‘유치원(幼稚園)의 장·단’
[시낭송가의 소소한 단상] ― ‘유치원(幼稚園)의 장·단’
■ 아름답구나, 우리말 가락
아침에 눈 떠보니 비가 내린다. 입하를 앞두고 만물을 소생케 할 곡우의 비가 내린다. 기후환경이 변했다 해도 절기는 여태 어김없다. 이제 봄을 배웅하고, 여름을 마중 나갈 채비를 할 때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저 연두의 어린것들이 그저 맑게 자라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새싹들이 다니는 유치원의 교육을 둘러싸고 다시 시끄럽다. 방송에선 “유치원”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우리말의 장단 가락을 갈라보자.
“유치원(幼稚園)”의 첫음절 ‘어릴 유(幼)’는, 조금 유별나다. 성 전환을 했기 때문이다. 원래 사성에서 장음인 거성이었는데, 평성으로 변한 몇몇 음절 중 하나가 유(幼)다. 지금도 『한한대자전』에는, 여전히 거성으로 표기돼 있지만, 이미 평성으로 성(聲) 전환된 음절이다. 그러니까 단음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젠 평성으로서의 단음이다. 그러므로 짧게 발음해야 한다.
유치원의 둘째 음절 ‘어릴 치(稚)’는, 거성으로 장음이다. ‘치’는 성(聲)의 변화 없이 원래의 제 성(聲) 그대로 거성이다. 따라서 “유치”는, ‘단+장’ 구조다. 이현복 서울대 언어학 교수는, 말의 길이를 쉽게 이해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단+장’을 “디땅”이라고 구음을 붙이고, 반대로 ‘장+단’을 “땅디”라 했는데, 우리에게 소리의 길이를 좀 더 쉬이 느껴지게 한다. 아주 간단하면서도 유용한 방법이다.
유치원의 셋째 음절 ‘원(園)’은, 평성으로 단음이다. 세 음절을 모두 합치면 ‘단+장+단’의 구조다. “디땅디~”. 그러므로 [유치ː원]으로 발음된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단장의 구조에서는, 앞의 단음절이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 마치 장대높이뛰기 선수가 높은 바를 넘으려고 장대를 바닥에 꽂고 튀어 올라 넘어가려고 하듯 돌연 긴장, 아연 소리가 더 짧아지며 높아진다. 그래서 ‘극단+장+단’의 구조로 바뀐다. 기계음이 아닌 한 여기서 첫음절의 단음 ‘유(幼)’가 별안간 더 짧아지고 높아지는 극단음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우리말의 오묘한 변화무쌍이라니~! 여기서 우리말은 노래에 가닿을 수 있으리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첫음절 ‘유(幼)는 ‘반의반박자(=16분음표)’, 둘째 음절 ‘치(稚)는’ ‘한박자(=4분음표)’, 셋째 음절 ‘원(園)’은 ‘반박자(=8분음표)’쯤으로 발화된다. (페북의 글쓰기 환경이 기호를 넣을 수 없어 아쉽다. 혹시 그게 가능한진 모르겠다.)
여기쯤 읽었을 때 혼자 자그마한 목소리로 “디땅디~”의 가락으로 [유치:원]하고, 발음해보신 분들도 있으리라. 앗~, 그러셨다고요?! “좋아요, 좋아~!” 그런데 뭔가 좀 어색하고 잘 안되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거기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이렇게 단음이 더 짧게 발음될 때는, 한 가지 고려할 사항이 있다. 발화의 시점을 늦춰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못갖춘마디(an incomplete bar)’처럼 말이다. 그랬을 때 정확하고, 명징하고, 마침맞은 발음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을 목소리 좋은 분들이 이렇게 발음한다면, 얼마나 멋질까. 생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마치 기계음과 같이 우리말 가락을 죽여놓은 한국어 사전의 "단단단" 가락의 [유치원]은, 수정돼야 한다.
눈치빠른 이들은 벌써 알아채리거나 질문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럼 장음의 발화 시점이 조금 이른 것인가?” 오호, 맞다. 마치 꾸밈음(Ornaments)의 발화처럼 조금 아주 살짝 조금 먼저 발화가 시작된다. 장고의 채편을 두드릴리 때 ‘따’가 있고, 딱이 있는데 이를 한번에 치는 걸 ‘끼닥’이라고 한다. 바로 저 ‘끼’가 꾸밈음이다. 장음의 발음이 그러하다.
한 번 ‘눈(雪)[눈:]’ 하고 꾸밈음의 발화로 말해보고 나서, 못갖춘마디의 “디땅디” 리듬으로 [유치:원]을 발화해 보면, [눈:]과 [유]의 장단음에서 그 발화의 시점 차이를 바로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도 아름답구나, 우리말의 가락~! 곡우비 맞고 푸르게 피어나는 연두빛으로...
“봄맞이 나온 유치원 아이들/ 조막막한 손으로 꽃잎을 어루만지니/ 꽃 다 심고 쉬는 할머니들/ 아이들 보며 벙그레해져선// 「아이구, 여기도 봄꽃이 한 무리네」” (장맹순, 「봄꽃」, 5연 1~2행.)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안도현, <바닷가 우체국>, 16~17행.)
출처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pfbid0TehGmrt54SXj8DQCaH9YE8znjCKmfZhM11fVYurLEWTrbpStagJa1aFCbpgac19cl&id=100054589251893&mibextid=Nif5o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