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서정주/성찬경/송수권/신경림
31. 백석 /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 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낮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
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
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끼며, 무릎을 굻어 보며
어느 먼 산 뒤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32. 서정주 / 자화상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를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찬란히 틔여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고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33. 성찬경 / 거리가 우주를 장난감으로 만든다
알맞게 구름이 끼어 있으면
해도 잘 익은 감 정도여서
오래 보며 놀 수 있다.
사실은 지구에서 해까지
광속으로 8분 걸리는 거리 덕택으로
해가 저렇게 예뻐 보이는 것이다.
개똥벌레의 정기총회 같은
하늘의 별자리.
구경 치곤 세상에서 으뜸이다.
그러나 저 별까지의 엄청난 광년의 거리가 있기에
무시무시한 불덩어리들의 모임이
저러한 신비의 향연이다.
거리만 있다면야
장비도 골리앗도 무서울 게 없다.
막 폭발한 성운의 사진이
영혼의 심부까지 스미는 추상화다.
직업 화가를 난처하게 만드는.
거리가 있기에 우주 구석구석이 서로 재미나는 장난감이다.
34. 송수권 / 지리산 뻐꾹새
여러 산봉우리에 여러 마리의 뻐꾸기가
울음 울어
떼로 울음 울어
석 석 삼년도 봄을 더 넘겨서야
나는 길뜬 설움에 맛이 들고
그것이 실상은 한 마리의 뻐꾹새임을
알아냈다
지리산 하下
한 봉우리에 숨은 실제의 뻐꾹새가
한 울음을 토해 내면
뒷산 봉우리 받아넘기고
또 뒷산 봉우리 받아넘기고
그래서 여러 마리의 뻐꾹새로 울음 우는 것을
알았다
지리산 중中
저 연연한 산봉우리들이 다 울고 나서
오래 남은 추스름 끝에
비로소 한 소리 없는 강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섬진강 섬진강
그 힘센 물줄기가
하동 쪽 남해로 흘러들어
남해군도의 여러 작은 섬을 밀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봄 하룻날 그 눈물 다 슬리어서
지리산 하下에서 울던 한 마리 뻐꾹새 울음이
이승의 서러운 맨 마지막 빛깔로 남아
이 세석細石 철쭉꽃밭을 다 태우는 것을 보았다.
35. 신경림 / 농무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가리를 앞장 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이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개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