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이야기

유치환과 이영도

시요정_니케 2023. 1. 27. 16:22

파도 / 유치환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님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무제1 / 이영도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窓)만 바라다가

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탑 / 이영도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 번 흔들지 못하고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는 사리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그리움 / 이영도

생각을 멀리하면

잊을 수 있다는데

 

고된 살음에

잊었는가 하다가도

 

가다가

월컥 한 가슴

밀고 드는 그리움

 

출처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170629.010220750050001

 

 

◆절절한 사랑

처자식이 있는 남자와 일찍이 과부가 된 두 시인의 순진한 사랑은 절절하기만 하다. 1952년에 유치환이 이영도에게 보낸 편지들의 일부를 보자. 정향(丁香)·정운(丁芸)은 이영도의 아호다.

‘사랑하는 정향! 어찌하겠습니까? 병 같기도 합니다. 낮에 당신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제는 허전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저녁이 되니 이제라도 당신에게로 뛰어가서 당신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울고 싶은 심정입니다만, 그러나 진아(鎭兒: 이영도의 딸)가 공부하고 있겠고-하는 어설픈 분별이 나를 붙잡았습니다. 정향 나를 미련하다구요? 그렇습니다. 황소나 수콤같이 미련한가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토록이나 애타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때에는 아무리 옳은 도리도, 거룩한 말씀도, 타이름도 아무 소용없는 실없는 헛것 같이밖에 들리지 않을 뿐, 달려가서 당신을 껴안고 울고만 싶을 따름입니다. 정향! 사람이란 얼마나 많은, 마음에 없는 말을 지껄여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참으로 마음에 쌓이고 쌓인 말은 모른 척 덮어두고 뚱딴지 같은 소리로서 외면 단장을 하는 것입니까? 더구나 당신 앞에 가면 내가 그러합니다. … 6월27일 당신의 마’

‘운! 어찌하여 내가 운을 이렇게까지 그리워하는지를 알고 싶습니까? 말하리다. 그것은 나의 정신이 의지할 수 있는 곳을 당신에게서 보아낸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당신도 생각하고, 내가 느끼는 것을 당신도 죄다 느끼는 때문입니다. 일호의 무리도 있을 수 없는 지순한 공명(共鳴)입니다. 나의 귀한 운! 죽어도 운 곁에 묻히고 싶다고 어느 날인가 내가 하소연했습니다. 내가 만약 정신-영혼-의 귀의를 운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던들 어찌 현실의 생명을 떠난 후에까지도 이런 소망을 가지리까. … 7월22일 당신의 마’

‘오늘은 죽을 성 우울했습니다. 바람이 심하고 안개가 자욱한 탓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돌아와 책상에 마주 앉아 뉘우침처럼 느껴지는 것은 진실한 사랑 앞에 얼마나 많은 사회적 제약이 막아서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당신 앞에서 정말 하고 싶은 말 아닌 헛이야기만 늘어놓다 왔구먼요. … 어디까지나 깨끗하고 얌전한 당신이기에, 어디까지나 말 없을 줄 압니다. 그리고 나 자신 내가 어떠한 자리에 있다는 것을 당신 앞에서는 더더구나 뼈아프게 느끼고 있습니다. … 8월14일 당신의 마’

‘사랑한 정운! 편지를 쓰지 말라는 당신 말씀을 잊은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아니 쓸 수 없는 것은 결국 이것이 나 자신의 위안이 되는 때문인가 봅니다. 진정 이렇게 종이를 대해서나마 당신을 불러보지 못한다면 어디서 이 애틋한 그리움을 풀겠습니까? … 8월17일 당신의 마’

‘운! 언젠가 이렇게 말씀 드린 것 기억하시는지요? -마가 시방 현재의 위치에서 결코 운을 욕되게 않을 자신이 있다던 것을- 즉, 이 말이야말로 당신을 범(犯)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의미한 것이었습니다. 표면에 나타난 우리의 행동을 두고 세상이 무어라 말하더라도 나의 진실에 있어서는 결코 나를 파계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마가 몇 차례의 여성과의 연애를 겪은 일은 당신도 잘 아십니다. 그러나 오늘 당신과의 애정에 있어서는 본질적으로 이것을 나의 어떤 유혹의 구변(口辯)인 줄로 아신다면 또한 그뿐, 어느 누구에게도 변명하고 싶지 않은 나의 진실입니다. 육체적인 것, 그것만을 당신에게 내가 추구했다면 나는 벌써 당신에게서 희망을 버리고 다른 데로 옮아갔을 것입니다. … 8월24일 당신의 마’

 

출처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170615.01022074749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