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낭송대회 지정시

이육사/이정록/이형기/장석남/정일근

시요정_니케 2022. 1. 11. 11:01

51. 이육사 /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52. 이정록 / 의자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 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있다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53. 이형기 / 낙화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激情)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訣別)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54. 장석남 / 망명

 

 

어둡는데

의자를 하나 내놓으면

어둠 속으로 의자는 가겠지

어둡는데

꽃 핀 화분도 하나 내놓으면

어둠 속으로 꽃도 잠겨가겠지

발걸음도 내놓으면 가져가겠지

 

어둠은 그렇게 식구를 늘려서 돌아가

어둠을 오가는 넋에게도 길 닦아주고

견고한 잠 속에는 나라를 세우고 나머진

빛으로 돌려보낼 터

 

어둡는데 길을 나서면

한 줌 먼동으로 돌아올 터

 

어둠에 살을 준다

사랑에 살을 준다

 

 

 

 

 

55. 정일근 /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이 그립다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어머니의 두레밥상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내 꽃밭에 앉는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밥상.

둥글게 둥글게 제비새끼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숟가락 높이 들고

골고루 나눠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혹은 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이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 버렸다.

밥상에서 밀리면 벼랑으로 밀리는 정글의 법칙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하이에나처럼 떠돌았다.

짐승처럼 썩은 고기를 먹기도 하고내가 살기 위해

남의 밥상을 엎어버렸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 어머니의 둥근 두레밥상에 앉고 싶다.

어머니에게 두레는 모두를 귀히 여기는 사랑

귀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 가르치는

어머니의 두레밥상에 지지배배 즐거운 제비새끼로 앉아

어머니의 사랑 두레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