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낭송대회 지정시

이화령쯤에서 / 이기철

시요정_니케 2022. 4. 29. 19:53

이화령쯤에서 / 이기철

황혼의 집들은 조금씩 신의 모습을 닮아 있다
산 아래 산이 눕고 길 아래 길이 누워
살아 있는 것들은 나무도 짐승도 조금씩
신의 모습을 닮아 있다

문경새재는 밤에도 키가 크고
서로 부대끼면서도 아파하지 않는 상수리들만
푸름을 놓쳐버린 잎들을 벌려
남쪽 마을을 향해 펄럭인다

이우출 시조비 제막식에
뇌졸중으로 오지 못한 신동집의 시 한 구절은
우리의 시월을 쓸쓸하게 했다
그날 모인 사람들은 아무도 수안보 길을 묻지 않고
병든 시인의 안부를 물었다

누가 나에게 신의 모습을 그리라 한다면
나는 산짐승들의 유순한 눈에 비친
저녁놀을 그리겠다

저녁의 빛깔이 하늘을 데우는 온기로 떠돌 때
숲은 햇빛을 제 몸 속으로 흡수하고
새소리를 몸 밖으로 뱉아낸다
사람보다 나무들이 먼저 겨울을 예감하기 때문이다

이름 모르는 마을의 집들이 짐승처럼 엎드려 있는
이화령쯤에서
아무도 제 슬픔의 빛깔을 채색하지 못할 때
주황색의 깃발을 들어 나는
지상의 추위타는 것들을 데워주고 싶다

이기철 시집. 《가혹하게, 그리운 이름》좋은 날. 1998년. 54쪽. 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