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제9회 변산마실길 전국시낭송대회 지정시1
유민의 돌 / 김남곤
-부안 주류성에서-
수정 같은 달
달 떨어질라
서천에 찢어진 깃발 하나 걸어두고
빨랫줄처럼 늘어선 목숨들이
목쇤 만세 한번이나 불러봤을까
밀어내기 땅 끝에 멎은
천근 짓눌린 저승 잠도
끝끝내 깨어나지 못하고
등뼈 꺽인 채 뒤채이고 있구나
피 삭아 길길이 자란
주류성 풀 울음소리 들어 보거라
바람 불어 뼈 시리게 몸 비트는
주류성 돌 울음소리 들어 보거라
그날
백제의 하늘을 무슨 낯으로 건너갔을까
주먹 쥔 그림자들이 고개 떨구고
천년도 더 넘게 먹 방을 지키고 있구나
이끼 낀 저 돌무더기에 피가 돌아
서리서리 몸 풀고 일어나
번갯불 같은 부싯돌 되는 날
그 날이 열리면
빛 부신 대낮이 될까
빛 부신 대낮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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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 김영기
내소사로 이끌었다
그대 모르는 약속 하나
창살 고운 법당에다 빌어볼 심산으로
전나무 숲길에 들어서자
직소폭포에서 쏟아지는 기운
벗은 발목에 잠기우고
야생화 향기가 얼굴을 스친다
현호색과 제비꽃
바람을 사랑하는 바람꽃
풀밭에 떨어진 별을 보고
무슨 꽃이냐고 묻는다
그대가 내 가슴에도 있듯
하늘에만 별이 뜨는 건 아니지
꽃 하나 따서 머리에 꽂아주니
그대마저 별꽃이 되어버렸네
종루에 죽은 듯 있던 목어
석양빛에 피가 돌자 물고기들을 부른다
그의 가슴에도 간직한 약속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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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항 가는 길 / 김월숙
돌아보지 말자
꾹 꾹 누르며 참다가
그예 터진 듯
새벽 첫차 구석진 자리
울음을 삼키려는
여자의 어깨로
밀물이 쏟아지고 있다
순식간에 공명통으로 흘러가는
그녀의 설움
파도를 부르고 너울을 부른다
버스는 이제 바다를 달린다
나는 문득 한 마리 청어
여자가 쏟아내는 소리를 듣는다
끝없이 밀려오던 물결
너머의 죽음
너머의 새로 돋는 이야기
돌아보지 않아도
잔잔해지는 그녀의 숨결
따라 풀어지는 내 등줄기
막 솟아오른 햇살이
그녀의 어깨를 보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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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子 / 문금옥
갯바람 뻘내음 대책없이 휘감아 도는 날엔
女子가 그리웠다
흩날리는 눈발에 젖어
부안읍내 한 마장 에움길 따라들면
살강에 얹힌 흰 막사발 같은
女子의 집이 엎디어 있다
※봉두메 산허리를 날베개 삼고 잠든 女子,
이화우梨花雨 잎새마다 몌별을 아로새긴
여자의 내력을 소상히 일러주는 듯이
억새는 빛 바랜 나삼 손사래친다
한때는 저 너머 적벽 노을처럼 들끊었을
더운 피 맑히어 외려 슴슴한 적요의 옷자락이
살붙인 듯 살가웁다
눈은 내려 쌓이고
돌아보면 지나온 발자국마저 아슴거리는데
이 눈발 깊어지면
꽃잎처럼 찍힌 마음의 지문도 지워지려나
난들에 섭슬리는 바람 따라 모두가 지워진다 해도
살아 있는 것들은 다만 사랑할 뿐,
애오라지 침묵하는 女子와 나 사이
천지사방 난분분 배꽃 같은 눈발이 차다
※봉두메 : 조선시대 부안의 명기名妓 이매창의 묘가 있는 곳. 일명 매창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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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바람꽃 / 박종은
겨울이 떠나지 않은 마을에서
이불을 살포시 젖히며 홀연히 얼굴 내미는
앙증맞은 변산의 아낙
낮은 자세로 눈의 높이를 맞추며
요모조모 정겹게 들여다본다.
하얀 미소 머금은
미나리아재빗과 너도바람꽃속 변산바람꽃
바람이 났나 보다
뽑아 올린 꽃대에 꽃잎은 발랑 까지고
오동통 물이 올랐다.
누구를 꼬드겨서
집 나가자는 게 아니라
꽃을 피우자는 바람
그의 입김이 가까이 느껴지지 않느냐며
나직이 속삭이는 바람
냉혹한 겨울 떨쳐내고 그를 맞이해서는
누구나 환한 꽃 피워내자고
채근하는 변산바람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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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석소리청 / 배 재 열
억년의 가요를 읽어내느라
바다의 기원은
켜켜이 쌓인 석판본에서
악보가 되지 못한 나이테를 점자로 읽어낸다
구전(口傳)으로 그러한
전래를 꿈꾸며 산 소리꾼
꽃샘의 혀로 매매, 한 세기의 채석을 다듬어
열꽃 낭자한 빌미를 세기고
백악단애 음역을 잡아채어
컬컬한 목청을 가다듬는 것이다
공룡 발자국 화석에서
공룡의 소리를 채어 내듯
파기되지 않는 섬섬 생환도(生還圖)에서
걸어 나와 오롯한 소리의 전당
모악당을 빌어다 파도의 파면으로 소리를 청한다
파열하는 소리를 그러모아
후에 훗날까지 분분하다고 할 것이며
만성풍우(滿城風雨)으로 열린 음역에서
발끝으로부터 차오르는 목청이 무겁게 청정하다
억 겹에 겹겹의 억 겹으로 쌓을 요량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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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에 /살으리랏다 // 소재호//
바다랑 산이랑/ 아득한 들녘 거느리고
풍족하게 부안 땅 휘휘저으며/ 변산에 살으리//
앞뜰에 눈 들면/ 철썩이는 /변산 바다
옥빛으로 /파도는 자꾸 달려오고/
금맥을 골골이 품은/ 변산에 살으리랏다//
세상에서 제일 고운/ 변산 노을 울렁이며/
낯선 사람들 여기 와서/ 다정하여라//
변산 바람꽃은/ 선녀의 /자취 향이라/
우리네 굽이치며/ 변산에 /살으리랏다 //
해와 달이 번갈아/ 홀홀 놀고/
변산 바다는/ 금물결 /은물결/
옛날 옛적 /순한 사람들 /고인돌세우며/
지포와 /반계와/ 석정 /선생님들 모시고/
학문과 예술/ 한껏 솟아 /청정한 깃발//
지아비와 지어미가/ 훈훈히 품어라//
사람을 끝없이 자아/ 명주꾸리 길길이/
산을 산으로 /난초 지초/ 획을 치나니/
행복은 천에 만을 /너울 대며는/
우리네 그림같이/ 변산에 /살으리랏다//
꿈 속이레라,/ 진경산수/
자하 비끼는/ 신선의 동네/
아하,/ 우리 /우리 /변산에 /살으리랏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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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숲에 들다 / 이 경 아
내소사 허리춤을 잡고 청련암 오르는 길
헐거워진 외투 자락 펄럭이는 바람 사이로
천만 개의 문을 닫는 겨울 숲에 들다
몇 가닥 남은 빛이 틈새를 여미는 중
발목을 덮고 누운 낙엽들이
물소리에 설핏 잠이 들고
이따금 뿌리째 젖은 발이 시린지
돌아눕는 소리 들린다
따뜻한 꿈을 펼쳤던 삶이 휘청거려
새 한 마리 빈 가지 흔드는 겨울 숲에 들다
숲은 온몸을 흔들어 깨어 있고 싶어
따끔거리는 살갗에 꽃눈을 여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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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석강의 연가 / 이 광 원
노을과 물결이 함께 부서진다.
사랑을 노래하고 떠나간 길
뒤에서
물새 떼 울음이 남아 있는
모래사장엔 발자국도 지워지고
바다 울음 목이 타 숨 몰아쉬는 파도
시름겨운 눈길로 가슴팍
터져 나온 그리움 딛고
내 가슴에 찰싹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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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포 일기 / 장교철
파도는 바다가 늘 불만이었다
거품 되어 썰물로 멀어진 후
적막
파도가 있기 전 바다가 있었다
바다는 파도보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났고
파도 몰래 속울음 쏟았다
밀물은 서툴게 살아온 파도를 기다리며 늙어갔고
바다는 등 돌린 파도를 향해 엎드려 기도했다
비켜선 고사포 소나무와 바람은 보고만 있었다
날이 저물었다이 오래갔다
아쉬울 땐 속내를 다 보여줄 듯
바다를 밀고 왔다
밀물은 파도를 안았고
상처도 다독이며 파도를 용서했다
바다를 잘 안다며 우기던 파도는
다시 썰물 되어 바다 경계까지 떠났고
다시 돌아온 파도를
바다는 타일렀다 우리는 핏줄이라고
파도는 말했다 용서와 거래가 우선이라고
출처: 원문은 출처에서 꼭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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