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낭송대회 지정시

[2022년]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 부천 제2회전국시낭송대회 지정시3

시요정_니케 2022. 6. 7. 10:24

원문은 다음 카페 [복사골시낭송예술협회]에서 확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출처
https://cafe.daum.net/naju1855/W7fx/4?svc=cafeapi

 

21.젖은 편지 / 박용섭

 

물안개 수평선 너머에 흐릿한, 글씨

바람 소리에도 고향 소식이 묻어오네요

그런 날들이 하루 이틀은 아니지만

노모께 드리는 안부 몇 자 꼬옥 쥐어 보냅니다.

 

수문을 열어도 거친 물결이 문턱 넘어 기도를 막고

해송 바늘 가슴 후비며 되돌아오네요,

아들 딸 각진 마음들

파도에 씻겨 동글동글 산촌 앞바다 모여들 것입니다

 

건 불로 따스했다가 금방 식어버리는 아랫목보다

군불 지피지 않아도 가슴이 따뜻한 골방

생솔 잎 연기 눈물 글썽이던 어머니

광목 치마폭이 그립습니다

 

빛이 추녀 끝 고드름 녹이면

새끼들 밥이나 먹었나

질긴 불면이 대나무 뿌리에 새겨진 채

새싹을 틔울 겁니다.

 

포구에 그물 깊던 투박한 손으로 길쌈을 하여

졸음에 눈 비비며 북을 밀어 베를 짜는 소리가

둥둥 크게 울리는 밤입니다

어느새 가을이 저만치 오네요.

 

 

22.범부의 노래 / 박희주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그 세상이 그립습니다

 

어린 아들아, 누굴 탓하랴

지금까지의 지난한 세월 모두가 허방뿐이구나

이제야 어쩌겠니 버틸 만한 신명이 나지도 않고

누가 나를 도울 아량도 없으니

돌아가야겠다, 울지 말아다오

 

소갈머리 없이 산다는 게 비굴하고

어디 한 군데 빠짐없이 악종만 가득

바라는 이들에게 눈물만 안겨

후생을 기대하기도 벅차다

슬퍼하지 마라, 아비가 귀족이 아님을

인연 만들기는 내 소관이 아니란다

서둘러 돌아가려는 건

시대가 나를 버린 게 아니라

내가 시대를 버렸으니

 

이렇게 잠을 이룰 수 없는 밤

금단의 고통은 깊고도 질기다

내 정신의 저울추가 기울었다

이제 무얼 더 바랄 수 있으랴

존재의 의미를 찾는 일조차 부끄럽고 부끄러울 뿐

 

말 많이 하지 마라 그런 화상일수록

머리가 텅- 비지 않은 이 없으니

불이 환할수록 귀가 밝을수록

낙원만은 아니란다 잠잠 하라, 제발

바늘귀가 커질 대로 커진 이 시대에

아직도 사막을 누비는 낙타는 당당하다

 

 

23.시풍 당당 / 서금숙

 

청룡사 안으로 들어가니

해체된 암막새 숫막새 대들보 누워 있다

세월 따라 흠이 났던 모양대로

비틀어진 그의 마음은 수없이 들락날락

중심을 잡고 버티려면

소나무의 어느 면을 크게 키우란 말인지

기둥은 기둥대로 성한 것이 뭔지

조목조목 죽은 내색하지 않게

헤쳐 모여 수없이 반복하는 동안

저절로 생긴 시어는 보물이다

썩고 문드러져 있는 뼈에 새살을 붙여주니

고르게 숨을 쉰다

구부러진 나무의 원 모습 그대로 쓴 기둥

깊은 아우름 속 푸른 용이 승천할 기세다

돌이키기를 오백 번 그를 이끌던

절간 같던 시

물가에 내 논 물고기처럼

이렇게 혹은 저렇게

새로 꾸미고 살겠다고 용을 쓴다

처마 끝 휘어진 풍경 꼬리를 흔든다

 

 

24.인연 / 안선희

 

 

짧은 만남으로 내 곁에 머물렀기에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몰랐습니다
이 작은 세상 어디서든
다시 만날 인연인 줄 알았어요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르고
언제부턴가
당신이 생각나면
눈물이 차올랐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우리는 다시 만났지만
인사도 나누지 못 하였어요
상심한 내 가슴은 빗장을 열고
당신을 멀리멀리 날려 보냈지요

사막 같은 세상 힘들어
그리움도 잊고 살다가
우연히 뒤를 돌아보았을 때
바로 등 뒤에서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로
사랑의 인사를 건네는 당신

우리가 같은 하늘 아래
공존하고 있음을 깨닫자
행복의 빛깔이
내 삶을 물들입니다

좋은 사람
당신이 또다시
나를 울게 합니다

 

 

 

25.서럽고 서럽고 서러운 이야기 / 양성수

 

모니카, 모니카

여섯 살 장녀 모니카

눈 설고 말 설고 반찬까지 설은

이상한 동화 속 아빠의 나라

 

엄마, 엄마

스물여덟에 세 아이 엄마

눈 설고 반찬까지 설은

이상한 동화 속 남편의 나라

 

아빠, 아빠

쉰 하고도 여섯에

한 살 세 살 여섯 살배기 아빠에

서른도 안 돼 이방인의 남편

 

안고, 붙들고

걸려가며 봄나들이 흥겨운 노랫소리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즐거움 한켠 콧등 시림이

 

아이 셋과 엄마는 진달래꽃 봄이건만

아빠는 찬서리 머리 얹은 마른풀 쑥대머리 웬 말인가

 

땀내 절은 모자

고달픈 삶의 현장

부서져라

부서져라

오늘을 위해 작은 몸뚱이 내 던져 보지만

가는 세월 누구인들 붙잡을쏜가

 

모니카! 모니카!

여섯 살 장녀 모니카

 

 

26.일출 / 우형숙

 

만월이 소리 없이

토해낸 이슬 밟고

풀냄새 졸고 있는 새벽길 헤쳐간다

숨 가쁜 달팽이 걸음,

축복으로 달래며

 

산골짝 바람 소리

온몸을 감는 순간

검붉게 하늘 뚫고 도도히 솟는 얼굴

천지간 손가락 걸고

복된 나날 맡긴다

 

쿵더쿵 가슴 달래

화살기도 날리면서

간절한 긍정의 힘, 온 세포 혼을 모아

겹겹산 인연의 굴레,

저 혼불에 기댄다

 

 

 

27.가리비 껍데기 / 유국환

 

 

 

비어있는 줄 알았던 마음이 슬픔으로 가득 차 있음을 해 질 무렵에야 알았다. 파도가 사자 갈기로 몸뚱이를 쳐 휘감고 나갈 때 시퍼런 꿈이 하얀 물거품으로 풀려나는 소리임을 가리비는 그제야 알았다.

 

해 질 무렵 견고했던 패각에 숭숭 구멍이 나서 촉수가 뜯기고 속살이 짓이겨질 때 금빛 자개는 이미 모래가 되었다. 빛나던 껍데기가 황혼에 젖었을 때 알았어야 했다.

 

밤이 되면 어느 누구도 붉게 타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비어있는 줄 알았던 생각이 부질없는 욕심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어둠별이 뜨고서야 알게 되었다.

 

처얼썩 쏴

낯선 별들이 모래알처럼 빛나자 물소리가 커졌다.

 

 

28.견습공 / 유미애

 

 

벤치에 앉아있던 공씨가 일어선다

자투리 천으로 엮은 풍선을 타고

시간의 난간을 건너간다

 

염료 냄비를 가득 채운 은유와 상징들

고작 몇 가닥, 하찮은 손금을 가진 그였지만

느린 손으로 짠 옷감은 사물 너머의 어떤 것

그의 손끝에서 사과의 뺨이 붉어지고

꽃의 열망이 꿈틀거리고

나비들은 소녀의 치마 위를 날아다녔지만

 

세상은 블랙 혹은 화이트로 압축되고

한해살이풀은 금방 시들어

더 이상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은 없었다

 

날마다 또 다른 공씨들이 공원으로 쏟아져 나오고

그들이 날리는 비행기와 풍선들로 도시가 흔들린다

과일 봉지와 견고한 희망 한 필을 들고

해바라기가 피는 골목으로 들어서고 싶었던 건데

밥그릇이 놓인 아랫목에 손을 넣어

자신의 이름과 온기를 확인하고 싶었을 뿐인데

 

하루 만에 풍선은 늙어버리고

종이비행기는 추락하고 말았다

마침내 그가 생으로부터 퇴출되던 날

습작기의 봄과 겨울이 교차하며 무늬를 새긴다

평생을 견습공으로 살아왔던 그의 작품은

이제 막 시작 되었다

 

29.어둠의 새끼들 / 유승우

 

 

 

어둠은 그 속에 우주를 배고 있는 어머니입니다 배고 있는 것은 다 낳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둠이 낳은 첫 새끼가 빛입니다 이 첫 새끼가 캄캄한 제 어미로 하여금 환한 소망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사흘이 지나서야 아가도 눈을 뜨고, 아버지로부터 큰 빛(-태양)이란 이름을 받습니다 아무리 큰 빛이라도 빛을 받을 짝이 없으면 외롭습니다 어둠은 첫 아들을 위해 별들을 낳아 하늘에 뿌려 놓았습니다 태양은 별들에게 눈길을 주고, 별들은 그 사랑으로 눈이 열립니다 서로 주고받는 그들의 사랑이 반짝 반짝 빛납니다

 

 

30.밸도 없고 속도 없다 / 윤석금

 

 

속없어 보이는 이웃집 여자

푸푸 꺼지는 말풍선에서

헤헤 헤 벌레가 기어 나온다

그녀와 사이

두꺼운 벽 안쪽에 실금을 긋고

헛웃음으로 메꾼다

문단속 없이 사는 잇속

이 틀어져 열린 문

바람 잘 날 없다

허풍선이 질투쟁이 머물다간다

헛기침 물고 허허실실

물컹거리는 웃음소리 받아내는

옆구리 터진 구두 코

별 반짝 잠든다

별똥으로 시 뽑고

소주잔에 달 받는 여자

속 가늠하는 시적어귀

땡감 나무에서 끌끌대는 매미

높은 음 목소리로

속없다 밸도 없다

소리 내는 법 배우는 여자

배꼽에 뜬 종생이별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