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김춘수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17. 김후란 / 눈의 나라 시민이 되어

 

 

겨울이면 나는 눈의 나라 시민이 된다

온 세상 눈이 다 이 고장으로 몰린다

 

고요하라 고요하라

희디 흰 눈처럼

차고도 훈훈한 눈처럼

고요하라는 계율에 순종한다

 

사랑을 하는 이들은

안개의 푸른 발

이사도라 던컨의 맨발이 되어

부딪히는 불꽃이 된다

 

겨울이면 나는 눈의 나라 시민이 되어

유순하게 날개를 접는다

 

그러나 이따금 불꽃이 되고

허공에서 눈물이

되려 할 때가 있다

슬픔이 담긴 눈송이들끼리

 

 

 

 

 

 

 

 

18. 김혜순 / 생일

 

아침에 눈 뜨면

침대에 가시가 가득해요

음악을 들을 땐

스피커에서 가시가 쏟아져요

나 걸어갈 때

발밑에 떨어져 쌓이던 가시들

아무래도 내가 시계가 되었나 봐요

내 몸에서 뾰족한 초침들이

솟아나나 봐요

그 초침들이

안타깝다

안타깝다

나를 찌르나 봐요

밤이 오면 자욱하게 비 내리는 초침 속을 헤치고

백 살 이백 살 걸어가 보기도 해요

저 먼 곳에

너무 멀어 환한 그곳에

당신과 내가 살고 있다고

행복하다고

당신 생일날

그 초침들로 만든 케이크와 촛불로

안부 전해요

 

 

 

 

 

 

 

 

 

 

19. 돌계단 / 나태주

 

 

네 손을 잡고 돌계단을 오르고 있었지.

 

돌계단 하나에 석등이 보이고

돌계단 둘에 석탑이 보이고

돌계단 셋에 극락전이 보이고

극락전 뒤에 푸른 산이 다가서고

하늘에는 흰구름이 돛을 달고 마악

떠나가려 하고 있었지.

 

하늘이 보일 때 이미

돌계단은 끝이 나 있었고

내 손에 이끌려 돌계단을 오르던 너는

이미 내 옆에 없었지.

 

훌쩍 하늘로 날아가 흰구름이 되어버린 너!

 

우리는 모두 흰구름이에요, 흰구름.

육신을 벗고 나면 이렇게 가볍게 빛나는

당신이나 저나 흰구름일 뿐이에요.

너는 하늘 속에서 나를 보며 어서 오라 손짓하며 웃고

나는 너를 따라갈 수 없어 땅에서 울고 있었지.

발을 구르며 땅에 서서 울고만 있었지.

 

 

 

 

 

 

 

 

20. 나희덕 / 와온에서

 

 

산이 가랑이 사이로 해를 밀어 넣을 때,

어두워진 바다가 잦아들면서

지는 해를 품을 때,

종일 달구어진 검은 뻘 흙이

해를 깊이 안아 허방처럼 빛나는 순간을 가질 때,

 

해는 하나이면서 셋, 셋이면서 하나

 

도솔가를 부르던 월명노인아,

여기에 해가 셋이나 떴으니 노래를 불러다오

뻘 속에 든 해를 조금만 더 머물게 해다오

 

저녁마다 일몰을 보고 살아온

와온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떨기 꽃을 꺾어 바치지 않아도

세 개의 해가 곧 사라진다는 것을 알기에

찬란한 해도 하루에 한 번은

짠물과 뻘 흙에 담근다는 것을 알기에

 

쪼개져도 둥근 수레바퀴,

짜디짠 내 눈동자에도 들어와 있다

마침내 수레가 삐걱거리며 굴러가기 시작한다

 

와온 사람들아

저 해를 오늘은 내가 훔쳐간다

Posted by 시요정_니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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