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 신석정

 

 

성근 대숲이 하늘보다 맑아

댓잎마다 젖어드는 햇볕이 분수처럼 사뭇 푸르고

 

아라사의 숲에서 인도에서

조선의 하늘에서 알라스카에서

찬란하게도 슬픈 노래를 배워낸 바람이 대숲에 돌아들어

돌아드는 바람에 슬픈 바람에 나는 젖어 온 몸이 젖어……

 

태양의 푸른 분수가 숨 막히게 쏟아지는

하늘 아래로만 하늘 아래로만

흰 나리꽃이 핀 숱하게 핀 굽어진 길이 놓여 있다

너도 어서 그 길로 돌아오라 흰나비처럼 곱게 돌아오라

엽맥葉脈이 드러나게 찬란한 이 대숲을 향하고……

 

하늘 아래 새로 비롯할 슬픈 이야기가 대숲에 있고

또 먼 세월이 가져올 즐거운 이야기가 대숲에 있고

꿀벌처럼 이 이야기들을 물어 나르고 또 물어내는

바람이 있고 태양의 분수가 있는 대숲

대숲이 좋지 않으냐

 

난아

푸른 대가 무성한 이 언덕에 앉아서

너는 노래를 불러도 좋고 새같이 지줄대도 좋다

지치도록 말이 없는 이 오랜 날을 지니고

벙어리처럼 목 놓아 울 수도 없는 너의 아버지 나는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

내 심장을 삼으리라

Posted by 시요정_니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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