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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동지 팥죽 / 김옥순

 

 

일 년 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길다는 날

어린 시절을 느껴보려

재미로 팥죽을 끓였다

 

나름 신경 써 끓였는데

함께 사는 사람이

새알을 안 넣어 맛이 없단다

 

나는 대번에

배가 불렀다고 면박을 줬다

 

그렇지 않은가

어린 시절에는 시래기국밥도 입에 달았는데

하물며 팥물에 찹쌀로 죽을 끓였는데도

맛없다고 하니 말이다

 

아들은 이따 먹는다고 하지만

먹어보나마나 맛없다 할 것이다

라면 맛보다 먼 죽 맛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엄마 한 그릇 나 한 그릇 맛있게 먹은 것은

어린 시절 가마솥에 소죽만큼이나 끓여

한 양푼 퍼 두었다가

동지섣달 긴긴 밤

며칠을 두고 먹어도 맛도 안 변했던

그 식은 죽 맛 한 번 느껴보려고

 

하지만 이 죽은

내일 저녁이면 맛이 갈 것이다

그 시절 식은 죽이 아니니까

 

 

 

 

12.그 놈 없었으면 / 김원준

-구두 뒤축도 못 꿰는 놈

 

바른잡이 왼손 같은 놈

칫솔질 할 때나 면도를 할 때나

그렇다고 수저를 잡을 때나

글을 쓸 때나 문을 열 때나

물건을 뜰 때는 어떻고

꽃삽을 쥘 때나 거름을 뿌릴 때나

소용에 닿지 아니하는 놈

기껏해야 건드렁거리고 걸을 때나

흔들거리고 몸에 좋잖다는 담배를

피울 때나 깜냥껏 폼을 잡을려는 놈

무료히 앉았을 때 콧구멍 속이나

찾아다니는 놈

그러구서도 똑같이 나누어 먹는 놈

없었으면 좋겠다 싶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한 생각 들이밀고 보면

그놈 없었으면 어쩔 뻔했는가

 

왼잡이 오른손 같은 놈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듯 보이는 놈

옥심이 덕지덕지 아귀같이 많은 놈

외양은 멀쩡하여 남 볼 때 제 놈이

모든 일 다 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하나도 하는 일 없이 허투루 사는 놈

시기와 질투가 똘똘 뭉쳐

반가운 친구가 손 내밀 때

제일 먼저 나가 생색내는 놈

여인네 흘러내린 귀밑머리나

쓸어 올리려는 놈

오죽 어줍잖으면

구두 뒤축도 제대로 못 꿰는 놈

본심으론 잠시라도 같이 있고 싶지 않은 놈

그래도 한 발짝 살짝 물리고 보면

그놈 없었으면 어쩔 뻔했는가

 

 

13.나라는 이름의 상자놀이 4 / 김은혜

 

 

상자 속에 앉아 오늘도 하루 종일 술을 마신다

술 속에 여러 얼굴이 담겨져 있다

찬찬히 살피니 낯익은 얼굴들이다

술을 삼키니 술은 내 속으로 들어와

나를 삼킨다, 나는 쓰러져 잠들었다

자고나니 텅 빈 상자 속에 여전히

그냥 혼자인 채 갇혀있었다

시간이, 견뎌내야 할 고통의 시간이

다행이 얼마간 내 마음에서

잘려져 나간 걸 알고 한숨을 몰아쉰다

알코올중독자가 된 건가 아닌가를

따진 여지도 겨를도 없이 상자 속의

나는 구부리고 앉아 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 속으로 다시

사라지기 시작했다, 우주의 모든 고통의

시간들을 다 쓸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술을 마시던 상자 속의 내가 어느 순간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는 걸

나는 보았다, 나는 차마 쳐다보지 못 한다

 

 

 

 

 

 

 

 

 

 

 

14.그런 친구로 살자 / 김종순

 

친구야!

예쁜 자식도 어릴 때가 더 좋고

마누라도 아랫동네가 즐거울 때요,

형제간도 어릴 때가 더 정겹고

친구도 형편이 비슷할 때가

진정한 벗이 아니던가!

돈만 알아 요망지게 살아도

세월은 가고

조금 모자란 듯 살아도

손해 볼 것 없는 인생사,

속기도 하고 져주면서도 살자

 

친구야! 큰집이 열 칸이라도

누워 잠 잘 때는 여덟 자뿐이고

좋은 밭이 만 평이라도

하루 보리쌀 두 되면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을 지니

친구야!

주안상 하나 놓고

묵은 지에 소주 한 잔 걸쳐가며

지나온 질곡의 세월일랑

훌훌 털어버리고 다가올

우리네 삶을 노래하자꾸나!

 

먼 곳에 있어 볼 수는 없지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올라

소식이 궁금하고 보고파지는 그런 친구,

목소리만 들어도 반갑고 정겨우며

아무 말이 없어도 같은 것을 느끼고

서로의 단점을 감싸줄 수 있는 그런 친구

설령 내게 잘못을 저질러도 밉지 않는 그런 친구,

만나면 헤어지기가 못내 아쉬워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그런 친구

자네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

정녕 그런 친구로 살자!

 

 

 

15.숲에 사는 소리 / 김철기

 

 

늘 시선 닿는 아파트 담 밖 울창한 숲 가운데

지난해 새로 조성된 솔안말 공원에 들었더니

밤꽃 흐드러진 밤나무 겹겹이 그늘 더 깊고

바람 흐르는 소리부터가 어린 날 향촌을 닮았어라

몇몇 종류의 꽃과 나무 돌과 물웅덩이

귓가에 퍽 가까운 숲새들 지저귐 리듬 타는데

풀벌레 낮은 소리 사이로

들어본 지 오랜 개구리 울음소리 도드라지다

누군가의 푸릇한 연인이었던 어느 때

숲길 걷다 개구리 떼로 울라치면

비 올까 봐 지레 호들갑 떤 발걸음소리가

담장 하나 돌아왔을 뿐인 숲

하찮게 만나는 바스락거림에도 스미었다

해질녘 구름 느릿한 하늘빛 속으로

층층이 감성 실린 음폭으로 퍼져 올라

혼을 깨워 들먹이는 영감

오늘을 살아 숨 쉼이 확연한 소리 되느니

높낮이 다른 생명력 솟는 소리

시차 오가는 추억 어린 소리

숲에 사는 소리, 소리들이여!

 

 

 

 

 

 

 

 

 

 

 

 

 

16.무의도 도꼬마리 / 김혜빈

 

 

어머니

실미도의 소문은 참으로 조용하지요

파도에 떠밀려온 밀어들이 회귀의 본능을 잊어버린 채

이념과 사상을 송두리째 뒤섞어버린

그 바닷길에 금기의 바람을 만져보셨나요

게릴라가 되어 다가온 자유는 아주 잠시 경계를 허물었지요

 

썰물이 내어준 울퉁불퉁한 모세길

오늘은 실미도에 짙은 발자국 남기기로 했어요

 

발걸음이 해를 비워내며 정서진 바닷길을 가르는 중이라고

갈매기가 그 길 위에 노란 웃음을 토해 놓지만

지나온 길을 지우지 못하고

전설의 이름들을 나지막이 하나씩 부르기만 했어요

물거품이 토해놓은 언어들의 슬픈 기록이

발자국에 자꾸 새겨졌어요

 

매직테이프처럼 내 다리에 붙어버린 684부대의 간절한

울부짖음을 들어보셨나요

타임머신을 되돌릴 새도 없이 화들짝 달려오는 밀물에

삼십육계 줄행랑치는 우리를

바위틈에 붙어있던 보말이 짓궂게 웃네요

 

어머니의 빛바랜 무명치마에 매달려있던 도꼬마리가

오늘은 내 옆구리에 붙어

실미도 갯벌에 번져오는 밀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앙상한 바람가시 키우네요

 

 

 

 

 

 

 

17.그립고 그립다 / 문신진

 

 

문득

소담스레 피어난 하얀 찔레꽃이 그립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벌써 봄을 기다린다는 것은 아니다

 

칼바람이 들창문을 뒤흔드는 바람에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그리운 것들이 하나 둘 깨어나기 시작했다

 

등걸 지핀 사랑방 굴뚝에 오르던

봄 안개 같은 풋풋한 나무 냄새의 연기가 그립다

수탉의 울음소리에 새벽이 열리면

맑은 영혼을 부르던 교회의 푸른 종소리도 그립다

 

김을 뿜어내며 솥뚜껑을 들썩이던 밥 냄새가 그립다

무명 저고리 흰 수건 두루신

어머니가 아랫목에 차려주신 밥상이 눈물이 나도록 그리워진다

 

그리운 것이 어디 이것뿐이랴

 

까까머리 친구들

빨간 손 호호 불며 땅거미 질 때까지

 

구슬치기, 연날리기, 팽이치기, 썰매타기, 딱지치기, 쥐불놀이에 바지 태우고

살얼음에 발 빠져 서럽게 울던 그때가 그립다

 

배고프고 가난해도 마음 넉넉했던 그때가 그리워진다

내려앉은 함박눈이 찔레꽃이다

춤추며 다가오는 찔레꽃 너머로

 

꼬마야 꼬마야 땅을 짚어라

두 발을 가지런히 들어 올리는 계집애들 단발머리 위로

빨랫줄이 휘파람을 부른다

 

 

 

 

18.중년이 되어 / 박미현

 

 

가난과 젊음이 전부였다

아이 들쳐 업고 기저귀 가방 메고 버스를 기다리며

집회에 나가고 토론을 하고

집집과 술집을 드나들며

끊임없는 의혹과 질문 속에서

밤은 늘 짧았으며 헤어지기가 싫었다

아이들은 자라고

갈등과 반론은 하나의 건강한 의식이었고

자기 고백과 절박한 구호

가야 할 방향이 있었으며

우리의 연대와 투쟁이

우릴 변화시킬 거라 믿었다

이제 우리는 집과 자동차가 있고

아이들이 어느 대학을 가고 어디에 취직을 하고

누군가는 도시를 떠나 귀촌을 하고

무슨 무슨 회사, 단체에서 중견이 되고

또 누구는 정치로 가고

애경사에서 만나는 중년이 되어

짐짓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고

다투어 세상을 욕하고 배운 티를 내고

몸에 좋다는 건강식품과

남의 얘기로 시간을 보내고

험담이 자랑으로 끝나고

살아남은 자의 다행과

질투와 이해타산을 느끼고

산다는 것에 대해 나름 치열했던 우리는

가난하지 않은데 가난하고

불행하지 않은데 행복하지 않은

진보도 보수도 아닌 기득권이 되어

방황도 없이 절망도 없이

기약 없는 약속을 하고

반갑게 헤어졌다

 

19.엽서 / 박수호

 

 

뒤돌아보는 눈길처럼 세월은

말을 걸어올 듯 말 듯 지나갔습니다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바람과

바람 따라 휘어지는 풀잎,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며

허리 꼿꼿하게 세웠던 날이 있었습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벚꽃잎이 휘날리는 모습을

담벼락에 기대어

눈에 담아두기도 하였습니다

그 풍경은 오랫동안 선연하였으며

우리를 고개 끄덕이게 하는 것은

작고 하찮은 것일 수 있다는 말을

입안에 굴리며 서 있게 하였습니다

알고 보면 나도 자잘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생각 속에는 되도록 간결한 이야기를

담아두는 것이 좋다는 말에 귀가 솔깃합니다

이제는 결 따라 흔들리는 일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20.노가리 천 원 / 박영녀

 

 

 

베레모 사내 노가리 천 원 술집에 앉아

노가리 천 원보다 조금 비싼 촉촉한 노가리 깐다

큰 키만큼 기다란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가시를 빼며

조용조용 노가리 깐다

 

소주 한잔 넘기고 세간에 돌고 있는 미투에 관한

변방에서 태어나 변방에 묻힐 사실이 아닌 사실 이야기

빈 술병이 늘어날수록 처음처럼 처음이 반복되는 말

핏대 선 목울대 노가리 깐다

 

오늘 술잔에 담겨 있는 이름 꺼내지 말라 하면

대답 대신 입에서 튀어나오는 파편 같은 노가리

누구누구랑 술 먹은 내일이며 금방 소문날 이야기

애써 모른 체하고 노가리 깐다

 

면접에서 덜어진 속내를 모자 속에 감추지만

삐죽거리며 나온 흰머리처럼

노가리는 꾸리꾸리 냄새를 풍기고

밤은 깊어 가는데

하품은 노가리 꼬리를 물고 노가리 깐다

 

 

 

Posted by 시요정_니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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