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석고상石膏像/ 신석정

 

­ 젊은 니힐리스트 홍에게서 들은 꿈 이야기

 

사뭇 푸른 하늘 아래

멀리 트인 푸른 벌판을

나는 누구를 찾아 이리 헤매이는 것일까?

 

끝없이 헤매이다 다다른

소나무 대 수풀 다옥한

작은 언덕 아래 작은 마을은

혈맥이 정지한 듯 고요한 마을이었다

 

아무리 목 놓아 불러보아도

마을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고

멀리 흐르는 강물소리

멀리 흐르는 푸른 강물소리……

 

그 언제 한물이 지내갔는가?

죽은 듯 고요한 이 마을은

엄청난 전란을 겪었는가?

죽은 듯 고요한 이 마을은­

 

 

문득 어느 집 층층계를 무심코 오르다가

흰 장미처럼 발가벗은 여인이

햇볕이 드시게 흐르는 창 옆에

가로누워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당황하였다

 

꼬옥 다문 입술이랑 감은 눈이랑

아무 말이 없다.

고요하다

 

어디서 비롯하여 어디로 끝나는

눈 덮인 산맥보다 희고 고운 곡선이여……

가슴을 파헤치고 머리를 묻어도

볼에 볼을 문질러도 말이 없다

 

끝끝내 껴안은 채 흐느껴 흐느껴 목메이게 울다가

차디찬 석고상에 소스라쳐 나는 꿈을 깨었다

 

시방 나는 안개 자욱한 거리를 헤매이며

다시 붙잡고 목 놓아 울어볼 사람을 찾노라

모두 움직이는 석고상인 것을……

모두 다 움직이는 석고상뿐인 것을 ……

 

오오

 

 

멀리 흐르는 강물소리……

역력히 들려오는 그 강물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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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차靈柩車의 역사歷史/ 신석정

 

 

강물 같은 밤을

잉태한 촛불 아래

 

분향焚香이 끝난

다음,

 

영구차靈柩車는 다락 같은 말에 이끌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흰 장미꽃으로 뒤덮인

관을 붙들고

놋날같은 눈물을 흘리며

목메어 우는 소녀를 보았다.

 

능금빛 노을이 삭은 하늘 아래

아아라한 산들도

입을 다물고 서 있는

황혼이었다.

 

영구차를 이끄는 백마白馬의 갈기가

바람에 나부끼는 것이

역력한 어둠발 속에

그 아리잠직한 소녀의 백랍白臘 같은 손아귀에 잡힌

영구차의 흰 장미꽃은 뚜욱뚝 떨어졌다.

 

아득한 어둠 속으로

저승보다 아득한 어둠 속으로

영구차를 이끄는 말발굽 소리와

그 영구차에 매달려 끝내 흐느끼는 소녀의 울음소리에

나는 그만 소스라쳐 깨었다.

 

촛불을 켜놓고

나는 시방 그 어둠 속에 사라지던

영구차와 영구차에 매달려 흐느끼던

소녀를 생각한다.

 

<그것은 아버지의 영구차도 아니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영구차도 아니었다>

 

<그것은 이웃들의 영구차도 아니었다>

 

이 지옥 같은 어둠이 범람하는 <지구>라는 몹쓸 별에

내가 아직 숨을 타기도 전에

그러니까 아주 오랜 옛날

그 어느 별을 지나갔을 나의 외로운 영구차이었는지도 모른다.

 

촛불이 흔들리는 강물 같은 밤에……

Posted by 시요정_니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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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숲을 가던 소년少年을 위한 시/ 신석정

 

 

자작나무 숲길을 한동안 걸어가면 자작나무 숲 사이로 자작나무 이파리보다 더 파아란 강물이 넘쳐 왔다. 자작나무 숲 아래 조약돌이 가즈런히 깔려있는 강변을 한참 내려다보던 소년은 자작나무 숲 너머 또 구름 밖에 두고 온 머언 먼 고향을 생각해 보았다.

 

자작나무는 자작나무대로 눈부신 태양의 분수 속에 하이얀 피부를 드러낸 채 강바람에 숨가쁘게 흔들리는 것을 소년은 제 심장의 고동으로 착각했다. 그때 소년의 심장도 자작나무보다 더 혼란스럽게 뛰는 것을 소년은 알았다.

 

이윽고 소년은 강변으로 내려왔다. 자작나무 숲을 빠져 강변으로 내려온 소년의 발길은 어찌 그렇게도 무거웠는지 소년은 알 길이 없었다.

그러기에 소년은 강물줄기를 타고 그 아리잠직한 제 꿈과 생시가 도도히 실려 가는 강물을 보는 것이 더 서러웠다.

 

해가 설핏했다.

노을은 연꽃 빛으로 곱게 타다간 또 사위어 갔다. 구름들이 모두 저희들의 고향을 찾아가노라고 분주한데 벌써 하늘에는 별들이 죽순처럼 촉촉 솟아 나오는 것을 소년은 강변을 걸어가면서 바라보았다.

 

별을 바라보던 소년은 문득 어머니를 불러 보았다. 그러나 대답이 없다. 어머니를 부르며 바라보는 하늘과 별은 한결 아스므라했다.

소년의 가슴속에 어머니가 살 듯 어머니의 마음 속에 소년은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 아득한 별 속에 소년은 있었다. 소년의 마음속에 별들은 있었다.

자작나무를 스쳐오는 푸른 강바람은 소년의 머리칼을 자꾸만 흩날리고 있다. 마치 눈같이 하이얀 백마白馬의 갈기가 오월바람에 자꾸만 날리듯이­.

Posted by 시요정_니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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