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아궁이 / 엄정옥
아버지가 가마솥에 불을 지피셨다
잘 마른 나뭇가지에 불이 붙으면
아궁이는 뒤뜰 감나무 홍시 빛깔보다 더 환해졌다
지난 계절 내내 가지에 묻은 바람들이 깨어나
너울너울 불꽃이 되어 흔들렸다
나는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나무의 생이 타들어가는 냄새를 맡았다
비리한 듯 은근한 듯
얻어먹은 술밥에 취한 것처럼 혼곤한 그 냄새가
삭정이 같이 구멍 숭숭한 처마를 지나고
뒤란 꽁무니에 매달린 굴뚝까지 돌아나가야
가마솥의 여물은 질긴 가난처럼 익었다
여덟 아이들 중 서넛은
기슭에 떨어진 도토리처럼 집을 떠났고
남은 아이들이 복닥거리는 작은 방에
서서히 온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저녁이면 어김없이 냄새가 피어올랐다
여위어 가던 아버지가 한 줌의 재가 되기 전까지는
아직도 아버지는 이승의 아궁이로 불을 지피시고
익숙한 나무 타는 냄새와 구들장을 번져가는 온기로
나는 오늘도 저물어가는 이 저녁을 살아낸다
ㅡ《경찰문화마당》2014년 제15회 경찰문화대전 금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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