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든 땅  언덕 위에 / 송수권

낯선 곳 낯선 풍경을 지치도록 달리다 보면
예살던 징검돌 하나라도 이리도 마음에 맺히는 거
물방아는 처릉처릉 하얀 물잎새를 쳐내고
달맞이꽃이 환한 밤길은
솔솔 어디선가 박가분 냄새가 코를 미었다
나는 지금 남부 이탈리아 롬바디 평원을 달리며
이 평원을 다 준다 해도
내 편히 쉴 곳 없음을 안다
베르디가 노래한 아침 태양도 내 가슴을 적셔 내리진 못한다
어디에선가 거대한 성곽에서 종이 울리고
진군의 나팔소리 따라
천국이 하늘 위에 있음을 일러주지만
아무래도 내 깃들일 곳은
이 대평원이 아니라 대숲 마을을 빠져나온 저녁연기들이
낮게 낮게 깔리는 그러한 들판이었다
시냇물이 흐르고 몇 개의 징검돌들이 놓이고
벌떡벌떡 살아 뜀뛰던 어린 날처럼
물방개라도 만나 보고 싶은 곳이다
이틀이나 사흘쯤 낯선 곳 낯선 풍경을 달리다 보면
이리도 흙냄새 그리운 거
징검돌 하나라도 이리 마음속에 떠오르는 거
아아 문둥이 장돌뱅이처럼 내 가슴에 닳아지는 얼굴들
지금쯤 흙담집 앞뒤란을 캄캄하게 겨울눈이 내리고
햇빛이 맑은 아침나절은 앞마당 참새 발자국도 깝죽거리겠다
구석진 골목길 왕거무가 집을 짓다 말고
따뜻이 등을 기대이겠다
멀리 보리밭 들판을 청둥오리 떼 날아내리고
보리싹 밀싹 파먹느라고
또 남녘 벌 끝 시끄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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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요정_니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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