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사)서은문병란문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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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은 선생님의 앙가지망(engagement) 시 감상


 


Ⅰ. 들어가기


  내가 고교에 입학하고 문병란 선생님을 만났을 때는 젊은 30대 초반의 선생님이셨고 강의하시는 모든 내용이 시어가 되어 학생들로부터 요즘언어로 인기 짱 이셨던 선생님이셨다. 당시 나는 1학년으로 선생님의 수업을 직접 들을 수 없었고 3학년 선배와 같이 하숙을 했기 때문에 그 선배가 틈만 나면 선생님의 강의 내용을 내에게 말해 주었던 기억으로 선생님의 존함을 익히고 있었다. 다음 학년도에는 광주로 전근을 가셔서 뵐 수 있는 기회가 없다가 내가 문단에 등단을 하고 첫 시집을 발간하면서 선생님의 발문을 받으면서 선생님과 연을 맺고 문학 활동을 하는데 많은 도움과 지도를 받아 왔다. 선생님의 처음 시작 활동은 순수 서정시로 출발하였으나 군부 정치와 유신정치의 비판에 앞장선 앙가지망의 참여문학에 참여하면서 교단에서 물러나 백수 시인의 길을 걷게 되었고 학원 강사로도 취업이 어려워 그야말로 젊은 시절 고난의 길을 걸어오신 우리 문단의 진정한 시인 이셨다. 민주화가 되면서 대학교수로 자리를 잡았지만 정년이라는 나이 때문에 그나마도 교수 생활이 길지 않았지만 선생님의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과 문학적 이론과 시론은 문학을 꿈꾸는 문학도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다보니 교수에서 퇴직한 후에도 선생님의 문하생은 끊이질 않았다. 필자인 나도 선생님의 문하생으로 지도를 받은 사람들 중의 하나다.


 


  우리가 흔히 시론을 접하거나 참여시 감상을 할 때 앙가지망(engagement)이라는 용어를 접한다. 나의 은사님이신 서은 문병란 선생님의 시 모두가 앙가지망의 시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의 시작 활동은 순수 서정시로 출발 하셨지만 선생님의 문단 생활은 앙가지망의 삶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먼저 선생님의 생애를 살펴보고 앙가지망의 참 뜻과 함께 지난 한글날 선생님의 시 한편을 감상문으로 하여 인터넷에 올렸던 내용을 이번의 지면에 실어볼까 한다.


 


Ⅱ. 서은 선생님의 생애와 앙가지망(engagement)  


  서은 문병란(文炳蘭 : 1935~2015)선생님은 전남 화순군 도곡면 원화리에서  출생하셨다. 1960년 조선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셨고, 1963년 『현대문학』에 「가로수」,「밤의 호흡」,「꽃밭」등이 김현승 시인의 추천을 받아 등단하셨고, 순천고, 광주일고, 조선대에서 교직을 역임하셨다. 시집으로는 『문병란 시집』(1971), 『정당성』(1973), 『죽순밭에서』(1977), 『땅의 연가』(1981), 『무등산』(1986) 등이 있고 1990년대 이후의 시집으로는 제1회 박인환 문학상 수상 시집 『내게 길을 묻는 사랑이여』(2010)를 비롯하여 『매화연풍』 등 32여집이 있고, 산문집으로 『저 미치게 푸른 하늘』(1979)등 13집이 있다.


  


 선생님께서는 1973년 시집 『정당성』을 내놓은 이후 시적 노선이 더욱 분명해졌다. 당시의 유신 독재 정권과 가진 자들의 횡포에 정면으로 맞서는 일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의 사명이며 존재 이유로 생각한 것이다. 선생님은 양심적인 시인으로서 홀연히 저항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선생님의 시정신은 1974년 『창작과 비평』겨울호에 「겨울 산촌」,「고무신」,「살인자」등의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반체제 저항 시인으로서 알려지게 된다.


 


 선생님은 민중 지향이라는 뚜렷한 시적 목표와 방향을 가졌기 때문에 선생님의 시어는 민중의 언어일 수밖에 없다. 시인 이시영의 말대로 서은 문병란 시인의 시어는 "별다른 지식 없이도 한번 읽으면 이내 그 뜻을 알 수 있는 평범하고 친숙한 언어"이고, 그것은 "민중의 생생한 생활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건강한 언어다. 이러한 '쉬운 시 쓰기'는 민중 속으로 들어가는 문학의 기법이며, 지식인을 위한 모더니즘 시를 극복하는 선생님의 문학적 방법이었다.


 


 이와 맥락을 같이하는 선생님의 민중시는 1970년대에 내놓은 시집 『죽순밭에서』(1977), 시문집『호롱불의 역사』(1978), 농민시집『벼들의 속삭임』(1980)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중『죽순밭에서』는 1979년에 도서출판 한마당에서 중간되었는데, 정부는 이 시집이 "외설스럽고 민족정신을 부정했으며 일본 국기를 모독했다."는 이유를 내세워 판매 금지 조치를 내린다. 서은 문병란 선생님은 이에 대해 25쪽에 걸쳐 그 부당함을 조목조목 따지면서 판금 조치를 철회하라는 항의서를 당국에 제출했다. 이 사건은 사회에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그 때가 유신정권 말기였다. 그 때의 항의서를 입수 할 수 없어 여기에 소개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앙가지망은 실존주의 철학에 그 근간을 두고 있다.


인간이라고 하는 실존은 완벽한 모습이 되기 위해 모순과 투쟁하며 자신의 창조적 자유를 위해 부조리와 투쟁하는 존재라는 철학적 사고에 따라 이  철학적 사고에 기초하여 발생한 용어다.


 


이를 구체적으로 그 개념과 의미를 살펴보면


앙가주망(engagement)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사르트르를 비롯한 실존주의자들에 의해 쓰기 시작한 용어로서, 사회참여(社會參與), 자기구속(自己拘束)이란 뜻이다.


 


 실존주의에서는 인간은 사회적 현실에 구속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그 현실을 변화시켜 나가는 존재라고 보며, 이러한 인간과 현실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써 이 용어를 사용했다.


 


 문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예술지상주의의 문학에 치중하는 것이 일반적 통례이지만 이 예술 지향이 사회적, 정치적 부조리까지도 터치하여 문학적 입장을 명확히 내세워 저항문학 참여문학의 형태를 가지고 모순과 부조리를 제거해 나가자고 하는 형태의 문학을 말한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작가는 상황을 폭로함으로써 세계의 변혁을 시도하고, 독자는 폭로된 대상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하므로, 작가와 독자 모두가 필연적으로 사회적 입장을 취하게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정치적 문제에 적극적 반응을 보이고 문제의 핵심을 작품으로 형상화하였다. 정치나 사회문제에 자진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을 앙가주망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러한 철학에 근간을 두고 참여한 시들이 과거 어두웠던 우리 사회에서는  많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선생님의 시는 참여시 이면서도 친숙한 언어의 서정성까지 담고 있어서 각계각층의 독자층을 가지고 이었을 뿐만 아니라 시낭송이라는 문학의 새로운 장르가 태동 되면서 선생님의 많은 시가 애송되고, 전국의 각종 시낭송 대회가 있을 때 마다 낭송작품으로 출품된 작품을 보면 「땅의 연가」 「직녀에게」 「인연서설」등이다. 앙가지망 시로서 낭송되는 이 작품들은 우리에게 너무나 낯이 익어 굳이 감상을 쓰지 않아도 되리라 보아 이 작품들의 감상은 생략하고 지난 한글날을 맞아 필자가 운용하는 네이버 문학밴드 『시와 이야기』에 「식민지의 국어 시간」 이라는 시 한편을 감상문으로 하여 올렸던 내용과 나의 첫 시집 『12월32일의 노래』에 축시로 써주신 「나눗셈과 뺄셈」을 이번의 지면에 실어볼까 한다.


Ⅲ. 시 감상


 


식민지의 국어시간 / 문병란


 


내가 아홉 살이었을 때


20리를 걸어서 다니던 소학교


나는 국어 시간에


우리말 아닌 일본말,


우리 조상이 아닌 천황을 배웠다.


 


신사 참배를 가던 날


신작로 위엔 무슨 바람이 불었던가


일본말을 배워야 출세한다고


일본놈에게 붙어야 잘 산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조상도 조국도 몰랐던 우리,


말도 글도 성(姓)까지도 죄다 빼앗겼던 우리,


히노마루 앞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말 앞에서


조센징의 새끼는 항상 기타나이(더러운 놈)가 되었다.


 


어쩌다 조선말을 쓴 날


호되게 뺨을 맞은


나는 더러운 조센징,


뺨을 때린 하야시 센세이는


왜 나더러 일본놈이 되라고 했을까


 


다시 찾은 국어 시간,


그 날의 억울한 눈물은 마르지 않았는데


다시 나는 영어를 배웠다.


혀가 꼬부라지고 헛김이 새는 나의 발음


영어를 배워야 출세한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스물다섯 살이 되었을 때


나는 국어 선생이 되었다.


세계에서 제일간다는 한글


배우기 쉽고 쓰기 쉽다는 좋은 글,


나는 배고픈 언문 선생이 되었다.


 


지금은 햐야시 센세이도 없고


뺨 맞은 조센징 새끼의 눈물도 없는데


윤동주를 외우며 이육사를 외우며


나는 또 무엇을 슬퍼해야 하는가


 


어릴 적 알아들을 수 없었던 일본말,


그 날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는데


다시 내 곁에 앉아 있는 일본어 선생,


내 곁에 뽐내고 앉아 있는 영어 선생,


어찌하여 나는 좀 부끄러워야 하는가


 


누군가 영어를 배워야 출세한다고


내 귀에 가만히 속삭이는데


까아만 칠판에 써놓은


윤동주의 서시,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글자마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오! 슬픈 국어 시간이여!


 


[감상]


 어떤 학자는 말했다. “시인은 과거를 점치고 미래를 예언한다고”


이 시 「식민지의 국어 시간」 이 바로 과거를 점치고 미래를 예언한 시라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과거를 점치고 현재를 주시하면서 미래를 예언 할 수 있는 시가 바로 앙가지망의 시다. 선생님께서 이 시를 쓰고 발표할 당시만 해도 오늘의 사회 현실과는 거리가 먼 시대였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을 들여다보자. 거리에 즐비한 상가 명은 물론이고 아파트의 이름을 보자. 우리의 의식 속에는 겨레의 말과 글보다 외국어를 더 중시하고 국적불명의 외국어를 사용해야 한 차원 더 높은 신분 상승이 되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다. 오죽했으면 시중에 우수개 소리가 떠돌고 있겠는가? 시골 사는 나이 드신 시부모가 도시 아들네 집 못 찾아오게 꼬부랑말로 아파트 이름을 짓는다는 이 풍자의 말을 우리는 무심코 넘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시를 감상하면서 사유되는 상상의 확장을 오늘의 현실과 비유하여 기술해 본 시감상이다. 이 시 본연의 시 감상을 위해 이 시에 대하여 선생님께서 저희들에게 들려 주셨던 시작 노트를 이곳에 요약해서 올려본다.


 


 몰라도 상관은 없지만 ‘히노마루’는 일장기, '센세이'는 선생님을 가리키는 말이고 ‘기타나이’는 더러운 놈이라는 뜻의 일본어이다. 일본에 의해 빼앗긴 우리말과 글을 되찾아 채 가꾸고 다듬기도 전에 다시 일본어를 익히고 영어를 배워야 했던 현실이 시인(선생님)은 부끄럽고 서글프다. 출세하려면 국어보다 외국어를 더 알아야하는 당시의 풍토가 시인으로서는 못마땅하다.


 


 우리말 가꾸기에 대해 말하면 오히려 세계의 변화를 쫒아가지 못해 뒤떨어진 사람의 넋두리로 받아들인다. 한글날이 1991년 국가공휴일에서 제외된 이후 28여년이 흘렀다. 이런저런 행사야 열릴 터이지만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겨레의 바탕인 우리말의 힘을 깨닫지 못하고 아직도 외국어를 더 중시하는 생각의 똬리가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밥집’이라 하면 허룸한 싸구려 식당처럼 보이고 ‘레스토랑’이라 해야 왠지 근사해 뵈면서 그곳에서 ‘칼질’을 한 사람은 올려다봐줘야 마땅할 것만 같다. 가게나 아파트 심지어 공공시설의 이름도 외국어로 지어야 품격이 있고 멋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외제가 무조건 좋은 시절도 아닌데 말과 글의 우리 것은 여전히 홀대받는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구호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님을 요즘 곳곳에서 증거 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제 더는 슬픈 국어시간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


 


Ⅳ. 나가는 말


 선생님은 고등학교 은사이시고 내가 문학의 길로 들어 와서는 선생님한테서 문학 지도를 받아왔던 제자로서 시건방지게 훌륭하신 선생님의 시를 가지고 말도 되지 않은 시감상이라는 미명아래 횡설수설 식 감상문을 기술 했다. 선생님께서 근모 이놈 하고 천상에서 꾸짖을 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아생전 선생님을 뵙고 문학 지도를 받을 당시 선생님께서 당신의 시로 시인의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하여 훈화하시면서 그 시의 시작 배경 또는 그 시가 갖고 있는 메타포와 메시지 등을 말씀 하실 때 나는 그 말씀을 노트도 하고 가급적 선생님의 시 정신을 배우고자 보관해 왔던 노트내용을 뒤적여 선생님의 시 감상을 올리는 무례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않고는 나의 필욕을 잠재울 수 없어 ‘서은 문학지 통권 제4호’의 원고로 선생님의 시 감상을 올리게 되었다.


 


 선생님께 문학 지도를 받았던 당시의 선생님께 받쳤던 나의 졸시 헌시와, 나의 첫 시집 ‘12월32일의 노래’ 발간 때 축시로 써 주신 시를 소개 하면서 본 소고를 마칠까 한다.


 


밑줄 / 이 근모


 


선생님 말씀 말씀에 밑줄을 긋습니다.


밑줄마다 시를 쓰는 길이 열립니다.


나는 그 길을 헤매는 나그네입니다.


어떨 때는 아스팔트길을 걷고


또 어떨 때는 신작로 자갈길을 걷는


나그네입니다.


가끔 가끔


신작로 자갈먼지 호통을 칩니다.


소중한 선생님 말씀 다 어딜 가고


밑줄만 달랑 남아 파르르, 파르르


가늘게 떱니다.


그럴 때 마다 나는


아주 중요한 생각의 선으로 살아나도록


그 밑줄에 덧칠합니다.


드디어 밑줄이 춤을 춥니다.


밑줄에 고추잠자리 내려앉아


벌겋게, 벌겋게 열정을 태웁니다.


귀뚜라미 밤샌 노래


이슬로 앉아있습니다.


목쉰 접동새 새벽녘을 알리고 나서야


밑줄 위에 나를 올려놓습니다.


파르르 떨던 밑줄 침잠된 고요로 새근새근


잠이 듭니다.


밑줄,


살아가는 이치가 그 안에 있었습니다.


 


(시작노트)


 이 시는 벌써 20여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당시 선생님을 찾아뵙고 여러 가지 가르침의 이야기를 듣고 난후 선생님께 바쳤던 나의 헌시다.


 


나눗셈과 뺄셈 / 문병란


-이근모 시집 ‘12월32일의 노래’ 출판에 부쳐-


 


내가 네 몫을 훔칠 때


굶주림은 날 빤히 쳐다본다.


이 을씨년스런 세계의 아침


국제 구제금융협회 총재


샤일록크씨는 맹물로 끼니를 때운다.


 


이 결핍의 시대, 네 몫을 훔치는


저 도적의 손들 그들의 십자가 아래서


그 빼앗긴 내 몫의 절반을 떼어주며


내 살은 떡이요, 내 피는 포도주라 속삭인다.


 


내가 반 조각의 빵을 나누면


눈물은 목마름 적시는 포도주


예수는 두 번 죽어 하늘을 보라하고


도적은 유유히 처형장을 빠져나간다.


 


보라, 훔치는 자 잔치 벌이는 날


흥부 바가지에 떨어지는 동전 소리


놀부 통장에 아라비아 숫자 재주를 넘고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오늘도 나는 망했네 양심의 자살.


 


그대는 계속 성공하고 나는 자꾸 실패하고


그리워요 배고파요 배 아파요


그 사이 공자는 인생관을 수정하고


떠나가는 맑스의 어깨위에


떡가루 같은 흰눈이 펑펑 내린다.


 


아, 인생은 나눗셈인가 뺄셈인가.


 


(감상)


 이 시 ‘나눗셈과 뺄셈’은 나의 첫 시집 출판 당시 IMF로 인하여 우리 경제가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고 나의 시집의 표제가 되었던 ‘12월32일’은 일용 근로자의 애환을 노래한 시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나의 시인의 길을 가도록 방향 제시를 해 주는 암시적 축시였다.


 이전투구 식 사회상과 남의 공을 자신의 공으로 가로채고 그러면서 한 점 부끄럼 없이 에헴하고 으스대는 ‘나눗셈과 뺄셈’의 메시지를 담은 이러한 선생님의 가르침을 나는 제대로 실행 하지 못한 어중이떠중이 시인으로 오늘도 방황 하고 있다.


 


 졸필로 작성한 나의 글을 읽어 주신 여러분께 감사와 아울러 천상에서의 선생님께 이 소고를 바친다.


 


선생님 영원하소서. 존경합니다.


 


2018. 11. 5.


제자 시인 이근모 근서


 


  
출처: 사)서은문병란문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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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요정_니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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