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옥천읍에서 북동쪽으로 10리쯤 떨어진 곳에 곧게 뻗어 나간 산줄기, 일자산(一字山)이 있다. 이 산의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여 실개천을 이루고 있는데, 이 개천을 건너는 다리가 청석교(靑石橋)이다. 지용은 1902년 6월 20일, 이 다리 바로 옆에 있는 촌가에서 한약상을 경영하던 연일 정씨 태국(泰國)을 아버지로 하고, 하동 정씨 미하(美河)를 어머니로 하여 4대 독자로 태어났다.
지용의 아명은 지용(池龍)이었다. 이 이름은 지용의 어머니가 연못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태몽을 꾼 데서 비롯되었으며, 본명도 이 음을 취해 지용(芝溶)으로 지었다는 것이다. 4대 독자인데다 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방랑생활을 했으니, 그에게 거는 어머니의 기대는 더욱 컸으리라. 그의 부친은 한때 중국과 만주를 방랑하며 한의술을 배웠고, 고향에 돌아와 한의업을 개업하여 재산을 꽤 모았으나, 어느 해 밀어닥친 홍수의 피해로 가세가 갑자기 기울어 가난했다고 한다. 원래 연일 정씨들이 집단촌을 이루며 살던 곳은 충북 수북리 꾀꼴 마을이었는데, 그 본고장에서 살지 못하고 하계리 개천가로 이사를 온 것이다. 그때 지용의 부친은 처가 친척인 송지헌의 농장에서 머슴살이를 했다. 지용은 “나는 소년적 고독하고 슬프고 원통한 기억이 진저리가 나도록 싫어진다”고 회고한 바 있다. 4대 독자로서 느껴야 했던 숙명적 고독감과 부친의 방랑과 실패, 가난 등으로 어린 지용은 불행했다.
지용은 17세에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휘문고보는 성적이 우수하고 형편이 어려운 그에게 재학시절에 장학금을 주었고, 졸업 후에도 유학 비용을 부담했다. 유학을 마치고 모교에서 영어 교사로 16년간 재직하였으니 지용은 통산 27년간 휘문과 관계를 맺은 셈이다.
휘문고보 1학년 때부터 문예활동을 시작한 지용은 그의 발안으로 명명된 동인지 『요람(搖籃)』의 산파역을 맡으며 습작활동을 시작했다.
『요람』의 동인은 고보와 전문학교 학생들로, 지용과 박제찬, 박팔양, 김화산 등이며, 지용이 간부로 있는 휘문고보의 등사기를 이용해서 제작하였다. 지용은 『요람』에 『정지용시집』 3부에 수록된 동시의 절반 이상을 발표했으며, 2학년 때는 『서광(曙光)』지에 『3인』이라는 소설도 발표하여 일찍부터 문재를 발휘하고 있었다.
지용은 1929년 3월 도시샤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9월에 모교 영어 교사로 취임했다. 취임 후 곧 분가하여 종로에 살림을 차렸다. 기나긴 타국 · 타향살이를 끝내고 마침내 가정이라는 안정된 보금자리에서 생활하게 된 것이다. 그는 12세 때 은진 송씨 재숙(在淑)과 결혼했지만 15년간이나 헤어져 살았다. 장남 구관(求寬)도 27세 때 얻을 수 있었다. 지용은 이제 학생에서 교사로, 하숙생에서 한 집안의 어엿한 가장이 된 것이다.
지용은 해방 직후 모교의 교사직을 사직하고 이화여전(梨花女專) 교수로 취임했다. 해방 후 그는 거의 시를 쓰지 못했다. 5년 동안 시 『곡마단』과 기념시 2편과 시조 5수 이외에는 작품이 없다. 당시 좌우익으로 대립되어 사회가 극도로 혼란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진로와 장래가 불투명한 정치상황에서 그는 방황했던 것이다.
1950년 6.25사변 때 서울에 있다가 북괴군에 끌려나가 문화선무대에 참여했다고 하며 그 뒤 소식이 끊겼다. 1953년 전후에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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