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漢拏山은 서서/ 신석정
태초太初였다.
너무 어두웠다.
그 무서운 혼돈混沌속에
한라산은 서서
뜨거운 가슴을 불을 뿜으며
몸부림쳤다.
<어둡다 !>
<어둡다 !>
<어둡다 !>
한라산의 목멘 소리……
그러는 동안
여러 천년이 흘러갔다.
하늘이
처음 열리던
그 어느 날 아침
머언 구름 밖에 아스라이 솟아오른
지리산智異山을
금강산金剛山을
백두산白頭山을
한라산漢拏山은 서서
역력히 보았다.
외롭지 않아서
한라산은 즐거웠다.
그 동안
또 여러 천 년이 흘렀다.
뜨거웠던 가슴을
백록담 차운 물로 달랜 다음
숱한 초목草木과 금수禽獸를 거느리고,
항상 바다 건너
머언 조국을 간절히 보살폈다.
사철 푸른
굴거리나무로 북가시나무로 빗죽나무로 꽝꽝나무로 비자나무로
한때 상처 입었던 아랫도릴 가리고,
철철이 피어나는
만병초꽃으로 동백꽃으로 협죽도꽃으로 뻐꾹채꽃으로 구름송이꽃으로
시로미로
가슴을 단장하고
머리를 단장하고……
한라산은 서서
착하게 살아왔다.
그 뒤
또 여러 천 년이 이어 흐르고 있다.
드세게 몰아치는 계절풍 따라
꽃가루 눈보라 철새도 오가는데,
한라산은 서서 태고太古히 서서
금강산을 부른다.
백두산을 부른다.
메아리도 없다.
지금 나는
우리 <윤>이가 비행기에 실려 보내온
밀감蜜柑을 지근거리며
문득 운무雲霧와 더불어 외로이 사는
한라산을
<윤>이보다 외로운 망아지들이 풀을 뜯는
한라산 백록담을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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