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地球가 회전廻轉하는 대로/ 신석정

 

 

 

거센 바람에 따르는 바다의 함성喊聲이라거나 밀림密林을 포효咆哮하는 짓궂은 짐승들의 몸짓이라거나 너와 나의 가슴을 두고 두고 왕래하는 불덩어리 같은 것이라거나 생각하면 짐짓 생각하고 볼 양이면 그것은 지구가 회전하는 대로 누적累積되는 검은 역사의 한 자락을 스쳐가는 바람결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췰 감출 수 없는 바람결이다>

 

터지는 양광陽光의 그 다사로운 품안에서 너를 달래고 나를 달래고 또 이웃을 달래고 몇 번이고 눈짓하고 끝내는 바스러지게 포옹을 할지언정 그것은 지구가 회전하는 대로 누적되는 검은 역사의 한 자락을 스쳐가는 포말泡沫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영영 스러질 수 없는 포말이다>

 

할딱이는 숨결로 이 치사스런 생명과 시를 다스리며 더러는 슬기로운 전쟁으로 불장난을 하고 더러는 삶과 죽음의 건널목에서 독을 머금은 혓바닥으로 꿈과 생시를 의논하며 녹이 슬었을 극락極樂을 의욕하지만 <지구>라는 지옥에서 허덕이는 한, 그것은 지구가 회전하는 대로 누적되는 검은 역사의 한 자락을 스쳐가는 꽃가루였다.

 

<그러나 그것은 뜨거운 필 머금은 꽃가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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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요정_니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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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歷史/ 신석정

 

 

1

저 하잘것없는 한 송이의 달래꽃을 두고 보드래도, 다사롭게 타오르는 햇볕이라거나 보드라운 바람이라거나 거기 모여드는 벌나비라거나 그보다도 이 하늘과 땅 사이를 어렴풋이 이끌고 가는 크나큰 그 어느 알 수 없는 마음이 있어 저리도 조촐하게 한 송이의 달래꽃은 피어나는 것이요 길이 멸하지 않을 것이다

 

 

2

바윗돌처럼 꽁꽁 얼어붙었던 대지를 뚫고 솟아오른 저 애잔한 달래꽃의 긴긴 역사라거나 그 막아낼 수 없는 위대한 힘이라거나 이것들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모든 것을 내가 찬양하는 것도 오래오래 우리 마음에 걸친 거추장스러운 푸른 수의囚衣를 자작나무 허울 벗듯 훌훌 벗고 싶은 달래꽃같이 위대한 역사와 힘을 가졌기에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요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3

한 송이의 달래꽃을 두고 보드래도 햇볕과 바람과 벌나비와 그리고 또 무한한 마음과 입 맞추고 살아가듯 너의 뜨거운 심장과 아름다운 모든 것이 샘처럼 왼통 괴어 있는 그 눈망울과 그리고 항상 내가 꼬옥 쥘 수 있는 그 뜨거운 핏줄이 나뭇가지처럼 타고 오는 뱅어같이 예쁘디 예쁜 손과 네 고운 청춘이 나와 더불어 가야 할 저 환히 트인 길이 있어 늘 이렇게 죽도록 사랑하는 것이요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달래꽃 꽃말: 신념 (출처: 모야모)

 

뱅어[뱅:]

 
하잘것없다:시시하여 해 볼 만한 것이 없다. 또는 대수롭지 아니하다.

다사롭다: 따뜻한 기운이 조금 있다.
보드랍다: 성질이나 태도가 억세지 않고 따뜻하다
어렴풋이: 기억이나 생각 따위가 뚜렷하지 않니하고 흐릿하게
조촐하다: 아담하고 깨끗하다
아담하다: 고상하면서 담백하다. 적당히 자그마하다

애잔하다: 몹시 가날프고 약하다
허울: 실속이 없는 겉모양
괴다: 입에 침이 모이거나 눈에 눈물이 어리거나 하다
어리다: 눈에 눈물이 조금 괴다

Posted by 시요정_니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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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상여 가는 길/ 신석정

­- 지하地下의 추엽秋葉에게 주는 시 - ­

 

임해산臨海山은 덩스럽게 높았다

 

그 아래로 그 아래로

다옥한 대 수풀이 있는 마을

그 마을에서 네 소년의 꿈은 나날이

바다처럼 자라났었다

 

바이올린을 들고

대피리를 들고

너와 내가 다니던 길은

찔레꽃 열매가 유달리 붉은 길이었다

바다 건너 연산連山이 푸르게만 푸르게만 보이는 길이었다

 

아버지를 두고

어머니를 두고

아내와 어린 것을 두고

네 꽃상여가 가던 길은 그 길이었다

 

너와 내가 거닐던 그 길에

네 꽃상여가 떠나던 그 길에

오늘 아버지의 꽃상여가 또 떠나야 하는 그 길에

 

슬픈 이야기만 빚어내는 찔레꽃 열매가 붉어 심장보다 붉어

슬픈 이야기만 빚어내는 바다 건너 연산이 푸르게만 푸르게만 보이는구나

다옥한: 초목 따위가 자라서 우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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