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구차靈柩車의 역사歷史/ 신석정
강물 같은 밤을
잉태한 촛불 아래
분향焚香이 끝난
다음,
영구차靈柩車는 다락 같은 말에 이끌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흰 장미꽃으로 뒤덮인
관을 붙들고
놋날같은 눈물을 흘리며
목메어 우는 소녀를 보았다.
능금빛 노을이 삭은 하늘 아래
아아라한 산들도
입을 다물고 서 있는
황혼이었다.
영구차를 이끄는 백마白馬의 갈기가
바람에 나부끼는 것이
역력한 어둠발 속에
그 아리잠직한 소녀의 백랍白臘 같은 손아귀에 잡힌
영구차의 흰 장미꽃은 뚜욱뚝 떨어졌다.
아득한 어둠 속으로
저승보다 아득한 어둠 속으로
영구차를 이끄는 말발굽 소리와
그 영구차에 매달려 끝내 흐느끼는 소녀의 울음소리에
나는 그만 소스라쳐 깨었다.
촛불을 켜놓고
나는 시방 그 어둠 속에 사라지던
영구차와 영구차에 매달려 흐느끼던
소녀를 생각한다.
<그것은 아버지의 영구차도 아니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영구차도 아니었다>
<그것은 이웃들의 영구차도 아니었다>
이 지옥 같은 어둠이 범람하는 <지구>라는 몹쓸 별에
내가 아직 숨을 타기도 전에
그러니까 아주 오랜 옛날
그 어느 별을 지나갔을 나의 외로운 영구차이었는지도 모른다.
촛불이 흔들리는 강물 같은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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