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구차靈柩車의 역사歷史/ 신석정

 

 

강물 같은 밤을

잉태한 촛불 아래

 

분향焚香이 끝난

다음,

 

영구차靈柩車는 다락 같은 말에 이끌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흰 장미꽃으로 뒤덮인

관을 붙들고

놋날같은 눈물을 흘리며

목메어 우는 소녀를 보았다.

 

능금빛 노을이 삭은 하늘 아래

아아라한 산들도

입을 다물고 서 있는

황혼이었다.

 

영구차를 이끄는 백마白馬의 갈기가

바람에 나부끼는 것이

역력한 어둠발 속에

그 아리잠직한 소녀의 백랍白臘 같은 손아귀에 잡힌

영구차의 흰 장미꽃은 뚜욱뚝 떨어졌다.

 

아득한 어둠 속으로

저승보다 아득한 어둠 속으로

영구차를 이끄는 말발굽 소리와

그 영구차에 매달려 끝내 흐느끼는 소녀의 울음소리에

나는 그만 소스라쳐 깨었다.

 

촛불을 켜놓고

나는 시방 그 어둠 속에 사라지던

영구차와 영구차에 매달려 흐느끼던

소녀를 생각한다.

 

<그것은 아버지의 영구차도 아니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영구차도 아니었다>

 

<그것은 이웃들의 영구차도 아니었다>

 

이 지옥 같은 어둠이 범람하는 <지구>라는 몹쓸 별에

내가 아직 숨을 타기도 전에

그러니까 아주 오랜 옛날

그 어느 별을 지나갔을 나의 외로운 영구차이었는지도 모른다.

 

촛불이 흔들리는 강물 같은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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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숲을 가던 소년少年을 위한 시/ 신석정

 

 

자작나무 숲길을 한동안 걸어가면 자작나무 숲 사이로 자작나무 이파리보다 더 파아란 강물이 넘쳐 왔다. 자작나무 숲 아래 조약돌이 가즈런히 깔려있는 강변을 한참 내려다보던 소년은 자작나무 숲 너머 또 구름 밖에 두고 온 머언 먼 고향을 생각해 보았다.

 

자작나무는 자작나무대로 눈부신 태양의 분수 속에 하이얀 피부를 드러낸 채 강바람에 숨가쁘게 흔들리는 것을 소년은 제 심장의 고동으로 착각했다. 그때 소년의 심장도 자작나무보다 더 혼란스럽게 뛰는 것을 소년은 알았다.

 

이윽고 소년은 강변으로 내려왔다. 자작나무 숲을 빠져 강변으로 내려온 소년의 발길은 어찌 그렇게도 무거웠는지 소년은 알 길이 없었다.

그러기에 소년은 강물줄기를 타고 그 아리잠직한 제 꿈과 생시가 도도히 실려 가는 강물을 보는 것이 더 서러웠다.

 

해가 설핏했다.

노을은 연꽃 빛으로 곱게 타다간 또 사위어 갔다. 구름들이 모두 저희들의 고향을 찾아가노라고 분주한데 벌써 하늘에는 별들이 죽순처럼 촉촉 솟아 나오는 것을 소년은 강변을 걸어가면서 바라보았다.

 

별을 바라보던 소년은 문득 어머니를 불러 보았다. 그러나 대답이 없다. 어머니를 부르며 바라보는 하늘과 별은 한결 아스므라했다.

소년의 가슴속에 어머니가 살 듯 어머니의 마음 속에 소년은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 아득한 별 속에 소년은 있었다. 소년의 마음속에 별들은 있었다.

자작나무를 스쳐오는 푸른 강바람은 소년의 머리칼을 자꾸만 흩날리고 있다. 마치 눈같이 하이얀 백마白馬의 갈기가 오월바람에 자꾸만 날리듯이­.

Posted by 시요정_니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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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따라/ 신석정

 

 

그때 나는

바람을 따라가고 있었다.

바람을 따라가면

바다같이 푸른 하늘에

구름이 떼 지어 흘러가고

구름 밖엔 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별들을 만나

밤이 이슥하도록

이야길 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지상에서 숱하게 일어났던 일을

그리고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별들은 역력히 알고 있었다.

 

별들과 이야길 주고받던 나는

갑자기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너무도 부끄러운 까닭이었다.

 

다시 바람은 나를 데불고

구름을 헤쳐 무지갤 건너서

새벽안개 자욱한

강 언덕을 찾아가고 있었다.

 

바람을 따라

강 언덕을 걷노라면

민들레꽃들이 모여서

흐드러지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민들레꽃들도

자랑할 수 없는 지상의 모든 일을

너무도 소상히 알고 있는데

나는 놀랬다.

 

바람을 따라

언덕길을 한참 걷다가

숲길로 빠져나가면

사슴 떼가 한가히 놀고 있었다.

 

이윽고

바람이 대숲으로 돌아간 뒤

홀로 언덕길을 헤매던 나는

끝내 흐느껴 울다가

소스라쳐 깨었다.

어디서 밀화부리*가 자지러지게 울고 있었다.

Posted by 시요정_니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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