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알고 있다/ 신석정

 

 

산은 어찌보면 운무雲霧와 더불어 항상 저 아득한 하늘을 연모戀慕하는 것 같지만 오래 오래 겪어온 피 묻은 역사의 그 생생한 기억을 잘 알고 있다.

 

산은 알고 있다. 하늘과 땅이 처음 열리고 그 기나긴 세월에 묻어간 모든 서럽고 빛나는 이야기를 너그러운 가슴에서 철철이 피고 지는 꽃들의 가냘픈 이야기보다도 더 역력히 알고 있다.

 

산은 가슴 언저리에 그 어깨 언저리에 스며들던 더운 피와 그 피가 남기고 간 이야기와 그 이야기가 마련하는 역사와 그 역사가 이룩할 줄기찬 합창合唱소리도 알고 있다. 산은 역력히 알고 있는 것이다.

 

이슬 젖은 하얀 촉루髑髏가 딩구는 저 능선稜線과 골짜구니에는 그리도 숱한 풀과 나무와 산새와 산새들의 노랫소리와 그리고 그칠 줄 모르고 흘러가는 시냇물과 시냇물이 모여서 부르는 노랫소리와 철쭉꽃 나리꽃과 나리꽃에 내려앉은 나비의 날개에 사운대는 바람과 바람결에 묻혀가는 꿈과 생시를 산은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산은 우리들이 내일을 믿고 살아가듯 언제나 머언 하늘을 바라보고 가슴을 벌린 채 피 묻은 역사의 기록을 외우면서 손을 들어 우리들을 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산이여 !

나도 알고 있다.

네가 역력히 알고 있는 것을

나도 역력히 알고 있는 것이다.


사운대다
가볍게 이리저리 자꾸 흔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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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기억記憶/ 신석정

­-어느 소년少年 의- ­

 

 

비오는 언덕길에 서서 그때 어머니를 부르던 나는 소년이었다. 그 언덕길에서는 멀리 바다가 바라다 보였다. 빗발 속에 검푸른 바다는 무서운 바다였다.

 

어머니하고 부르는 소리는 이내 메아리로 되돌아와 내 귓전에서 파도처럼 부서졌다. 아무리 불러도 어머니는 대답이 없고, 내 지친 목소리는 해풍海風속에 묻혀 갔다.

 

층층나무 이파리에는 어린 청개구리가 비를 피하고 앉아서 이따금씩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청개구리처럼 갑자기 외로웠었다.

 

쏴아먼 바닷소리가 밀려오고, 비는 자꾸만 내리고 있었다. 언덕길을 내려오노라면 짙푸른 동백잎 사이로 바다가 흔들리고, 우루루루 먼 천둥이 울었다.

 

자욱하니 흐린 눈망울에 산수유꽃이 들어왔다. 산수유꽃 봉오리에서 노오란 꽃가루가 묻어 떨어지는 빗방울을 본 나는 그예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말았다.

 

보리가 무두룩이 올라오는 언덕길에 비는 멎지 않았다. 문득 청맥靑麥죽을 훌훌 마시던 어머니 생각이 났다. 그것은 금산리琴山里란 마을에서 가파른 보릿고갤 넘던 내 소년시절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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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창穀倉의 신화神話/ 신석정

 

 

바다도곤 넓은 김만경金萬頃 들을

눈이 모자라 못 보겠다 노래하신

당신과 우리들의 이 기름진 땅을

 

아득한 옛날에

양반과 벼슬아치와

조병갑이와 아전 떼들의 북새 속에서

 

그 뒤엔

을사조약乙巳條約에 따라붙은 동척회사東拓會社

가와노상과 노구찌상과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

왜놈의 통변들의 등쌀에 묻혀

 

격양가도 잊어버린 벙어리가 되어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아들과

손주들이 대대로 이어 살아왔더란다.

 

서러운 옛 이야기 지줄대며

동진강東津江 굽이굽이 흐르는 들을

그 무서운 악몽이 떠난 지 스무 해가

되었다 하여

우리 할아버지들의 피맺힌

옛 이야기를 잊지 말아라.

 

태평양太平洋을 건너왔을

지리산智異山을 넘어왔을

모악산母岳山을 지나왔을

다냥한 햇볕이 흘러간다 하여

 

우리 할아버지들의 땀이 배어든

이 몽근 흙을 잊지 말아라.

 

그 언젠가는 이 기름진 땅에

우리 눈물겨운 소작인小作人의 후예로 하여

드높은 격양가로 메마른 산하를 울리고

 

미국보리와 풀뿌리로 연명하던

그 서럽고 안쓰러운 이야기는

 

동진강 푸른 물줄기에 실려

아득한 아득한 신화로 남겨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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