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뉘앙스] ― ‘첫째와 첫 번째’
예전엔 책을 주로 보고, 논문을 간간이 봤다면, 요즘엔 책보다는 논문을 더 자주 보는 편이다. 책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논문에서 이유와 근거를 여럿 제시할 때, ‘첫 번째, 두 번째…’라고 잘못 쓰는 걸 무척 자주 본다. 명토 박아 말하지만, 이럴 땐 당연히 ‘첫째, 둘째…’라고 써야 한다. 영어에선 ‘첫째와 첫 번째’의 구분 따윈 없다. 그저 단순하게 ‘first’ 하나로만 쓴다. 그러나 우리말에선, ‘첫째/첫 번째’의 쓰임이 서로 다르다. 그 뉘앙스가 달라도 팔팔결 다르다.
그럼 ‘첫째/둘째/셋째…’는, 어떨 때 쓰이는가. 간단하다. ‘공시적(共時的)’일 때 쓰인다.
첫째,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근거나 이유를 나열할 때 쓰인다.
둘째, “첫째 칸, 둘째 칸”처럼 열차의 몇째 칸을 지시할 때 쓰인다. 이때 ‘첫 번째 칸, 두 번째 칸’은 틀린 말이다. 2020년 3월 31일 자 <뉴스웍스>의 기사에, 당시 미래통합당의 비례대표 위성 정당인 미래한국당 원유철 대표가 이렇게 말한 게 실렸다. “미래 열차 ‘두 번째 칸’을 선택해주고 탑승해 달라”고. 이는 “미래 열차 ‘둘째 칸’을 선택해주고 탑승해 달라”고 해야 맞는 말이다. 이걸 써준 보좌관도, 또 그걸 그대로 읽은 원유철 의원님도, 그리고 오류를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기사를 쓴 기자도 다 놓쳐 버린 것이다. ‘공시적(共時的)’일 땐, ‘둘째’지 ‘두 번째’가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 아랍처럼 남편 하나에 여러 부인을 두는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에서 “첫째 부인, 둘째 부인, 셋째 부인”이라고 해야 한다. ‘일처다부제(一妻多夫制)’도 마찬가지다. “첫째 남편, 둘째 남편, 셋째 남편”이라 한다. 아름다운 사례는 아니지만, 바람둥이가 동시에 여러 애인을 만나는 경우도 그러하다. “첫째 애인, 둘째 애인, 셋째 애인”이라고 한다. 이 역시 ‘공시적(共時的)’이다.
다음으로 “첫 번째/두 번째/세 번째”는, 어떤 경우에 쓰이는가. 간단하다. ‘통시적(通時的)’일 때 쓰는 말이다.
첫째,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에서 사별하고 재혼한 배우자는, ‘두 번째 부인/두 번째 남편’이 된다. 만일 재혼해 얻은 부인이 ‘둘째 부인’이 되려면, 죽은 부인이 살아 돌아와 함께 살 때만 가능하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는,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첫 번째/두 번째’는, 어떤 동일한 성격의 일이 끝나고, 새롭게 시작될 때 쓰이는 ‘통시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둘째, 어떤 행사에서 입장식의 리허설을 여러 번 할 때가 있다. 이럴 경우는 ‘첫 번째/두 번째’다. 그러나 실제 본 행사에서 입장하는 순번이 아홉째라면, “‘아홉째’로 입장하는 충청도 선수단입니다”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아홉 번째’로 입장하는 충청도 선수단입니다”라고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오류다. 왜냐하면 “아홉 번째로 입장한다”는 것은, 여덟 번을 입장하고 나서 아홉 번째 다시 입장할 때 쓸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리허설이 아닌, 실제의 본행사에선 이런 경우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잘못 쓰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정확한 우리말이 어느결에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자주 쓰다 보면 익숙해지리라.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뀔 때 처음에나 낯설었지, 이내 익숙해지지 않았는가. 이는 특히 우리말의 교과서인 아나운서들께서 더욱 잘 가려 쓰신다면, 아주 좋을 듯하다.
출처
https://url.kr/jxfln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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