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기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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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더 아름답게 표현하는 ‘낭독’

한국어는 장단 중심의 언어다. 강세 중심의 영어, 고저 중심의 중국어와 다르다. 춘천 출신 김진규 시낭송가가 ‘장음의 발견-달라지는 낭독과 낭송’을 펴냈다. 강원교육연구소 세 번째 교육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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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장음의 발견 - https://www.aladin.co.kr/m/mproduct.aspx?ItemId=338020264


P.80
한국어 달인이 되려면, 우리말 어법 한 가지를 꼭 익혀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평고조’라는 것입니다. 한국어에서 짧은소리인 단음(=평성)은 긴소리인 장음(=측성) 앞에서 아연 더욱 짧아지며 동시에 돌연 높아집니다. 이는 어김이 없습니다. 예외 없는 법칙과도 같습니다. 예를 들어 “고귀(高貴)하다”에서 첫음절 ‘높을 고(高)’는, 평성으로 단음이고, 둘째 음절 ‘귀할 귀(貴)’는, 거성으로 장음입니다. 그러니까 소리의 길이에서 “고귀(高貴)”의 구조는, ‘단+장’의 음장 구조가 되는데, 이때의 단음은 더욱 짧아져서 ‘극단음’으로 변합니다. 우리말의 변화무쌍한 특징입니다. 따라서 음장(音長) 구조는, ‘단+장’에서 ‘극단+장’으로 바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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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과 낭송에서 포즈(pause, 일시적인 멈춤)만 제대로 구현해도 그 수준이 확 달라진다. ‘낭독과 낭송의 70%는 포즈에서 이루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즈는 낭독과 낭송의 중심고리다. “휴지(休止)나 사이가 없다면, 즉 포즈를 구현하지 못한다면 템포나 리듬의 변화도 없을 것이며, 억양과 어조의 생명력도 살아날 수 없다.”(김홍철). 이처럼 포즈는 낭독과 낭송에서 무척 큰 비중을 차지한다. 정확한 포즈는 자신과 청중에게 텍스트의 의미를 정확히 전달할 수 있다. 나아가 텍스트의 화자 심리를 청자에게 정확하게 전할 수도 있다. “포즈의 위치만 바꿔도 얼마든지 다양한 정신 상태를 만들어낼 수 있다.”(스타니슬랍스키). 논리적 포즈가 단어를 하나의 그룹으로 묶어주고, 그 묶인 그룹은 다른 그룹과 분리되는 기능을 지니기 때문이다.

말을 할 때에는 모국어 본능이 작동돼 포즈의 오류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포즈의 오류는 주로 텍스트를 읽을 때 자주 발생한다. 쓰기에서 띄어쓰기는, ‘문법’에 따라 띄어쓰기의 원칙대로 쓰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읽기에서 띄어 읽기는, ‘어법’에 따라 띄어읽기의 원칙대로 띄어 읽으면 된다. 문법과 어법이 다르기 때문에 읽을 때는 어법에 따라 읽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텍스트를 읽을 때 흔히 띄어쓰기(문법)대로 띄어 읽는 오류를 범한다. 쓰기에 따른 문법대로 띄어 읽는 바람에 대부분 어색한 읽기가 돼버린다. 치명적 오류가 일반화된 상황이다.

낭독과 낭송은 자연스러움이 가장 큰 미덕이다. 말하듯, 노래하듯 읽는 수준이 최고의 낭송 수준이다. 고대 그리스인은 시를 가리켜 ‘ta mele’로 불렀다. 이는 ‘노래로 불리기 위한 시’라는 뜻이다. 시인 에드워드 히르시는 “시는 언제나 말과 노래 사이를 거닐어왔다”고 했다. 포즈의 기본을 익혀 텍스트를 말하듯, 구술담화형식으로 구현한다면 낭독과 낭송은 분명 달라질 것이다, 히르시의 말마따나 ‘말과 노래 사이를 거니는’ 수준까지 갈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포즈에서 흔히 범하는 오류는 다섯 가지쯤 된다. 첫째, 관형사에 명사가 이어진 문장에선 붙여 읽어야 하는데도, 띄어 읽는 오류다. 그런데 만일 관형사와 명사 사이에 ‘수식어’가 들어간 경우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이런 땐 관형사에서 띄어 읽어야 한다. 둘째, 선택의 의미가 없는 관형사는 띄어 읽어야 하는데, 붙여 읽는 오류도 흔히 나타난다. 셋째, 소유 관계에서 내게 속한 표현은 붙여 읽어야 하는데, 띄어 읽는 오류. 넷째, ‘속성의 의미가 있는 경우’에는 띄어 읽어야 하는데, 붙여 읽는 오류. 다섯째, 관심의 중심에 따라 관심사가 앞에 있는 경우 붙여 읽고, 관심의 초점이 뒷 문장에 있을 경우엔 띄어 읽어야 하지만, 이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오류다.

한편 한국어에서 지켜야 할 포즈의 기본은 대체로 일곱 가지다. 1) ‘주격 조사’에서, 2) ‘연결어미’에서, 3) ‘문장부호’에서, 4) ‘독립언(감탄사·제시어·부름말)’에서, 5) ‘부사·부사절’에서, 6) ‘육하원칙’에서, 7) ‘강조하는 문장’ 앞에서 띄어 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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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가의 소소한 단상] 낭독과 낭송에서의 포즈

낭독과 낭송에서 포즈(pause, 일시적인 멈춤)만 제대로 구현해도 그 수준이 확 달라진다. ‘낭독과 낭송의 70%는 포즈에서 이루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즈는 낭독과 낭송의 중심고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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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아버지가#방에들어가셨다” 또는 “아버지가//방에들어가셨다”라고 읽는다. 이는 둘 다 그릇된 띄어읽기다. 이야기를 더 진척시키기 전에 먼저 [/]은 ‘반휴지’, [#]은 ‘보통휴지포즈’, [//]은 긴휴지의 기호라는 것을 밝힌다.

주격조사 다음에 휴지를 두어야 하는 것은, 포즈의 기본 원칙. 하지만 이번엔 휴지를 주지 말고 이렇게 읽어보자. “아버지가방에들어가셨다.” 그리고 이어서 바로 반휴지를 두어 “아버지가/방에들어가셨다”를 읽어보자. 어떤 차이가 있는가?!

주격조사 ‘가’와 ‘방’ 사이에 휴지가 있을 때와, 그냥 붙여 읽었을 때에 그 시간상의 차이는 거의 없다. 그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붙여 읽었을 때 조사 ‘가’와 ‘방’ 사이엔 굴곡이 전혀 생기지 않으나, 반휴지를 주었을 땐, 굴곡이 생긴다. 하여 반휴지를 ‘억양휴지’라고도 한다. 둘의 차이를 좀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예를 한 가지 더 든다. “나는/학교에갔다”와 “나는#학교에갔다, 나는//학교에갔다”를 이어 읽어보며 차이점을 느껴보자. “나는#학교에갔다, 나는//학교에갔다”에선, 주격 조사 뒤 학교의 ‘학’이 높은 음에서 출발하는 반면, “나는/학교에갔다”에서처럼 반휴지를 두었을 때는, ‘학’이 조금 아래에서 출발해 올라가는 ‘억양’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늘 자연 상태에서의 발화에선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인위적 읽기에선 그리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해와 훈련이 필요하다. 연극의 대본 읽기에서든, 시낭송에서 읽기 과정에서든 모두 마찬가지다.

음절·단어·어절·구·행·연 사이에 자리 잡은 쉼의 길이는, 동일하지 않다. 각기 다른 쉼은, 각각 다른 분별과 판정과 반성과 사색의 기회를 제공한다. 시어(詩語)에는 저마다의 울림이 있다.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로 선택된 단어 하나하나에는 물론이고, 맥락 속에서 새로워진 의미가 담긴다. 거기엔 분명 어떤 득의와 근심과 회피와 무관심 같은 생각과 정조가 깃들었다. 우리가 문자 텍스트를 단순하게 ‘음성적으로만 실현’해서는, 그 정조의 울림에 가닿을 수 없다. 자연스러운 쉼과 울림의 질서와 흐름을 타야 한다. 쉼은 지속을 통해 의미를 얻고, 지속은 울림을 얻을 때, 그때 비로소 풍부하게 의미가 구현된다.  

자연스러운 낭송을 하려면 소리에 민감해야 한다. 특히 낭송가는 자신이 어떻게 말하는지 깊게 생각해야 한다. 그에게 있어 말이란 ‘예술의 도구이자, 예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https://www.chunsa.kr/news/articleView.html?idxno=47342

[시낭송가의 소소한 단상] 휴지(休止, pause)의 종류와 ‘반(半)휴지’

휴지(休止)는 ‘포즈(pause)’, ‘쉼’, ‘띄기’, ‘띄어 읽기’, ‘끊어 읽기’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여태 통일된 개념으로 정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휴지의 주요 기능은 ‘호흡’, ‘의미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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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 양반’이 이거 왜 이래?” 맥주집 앞에서 시비가 붙은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이 문장에서 관형사 ‘이’에 이어진 명사 ‘양반’은, 붙여 읽어야 한다. 아무 생각 없이 말할 때는, 외려 제대로 잘 붙여 말한다. 모국어의 본능이 작동되기 때문이다.

반면 말하기가 아니라, 글로 된 문장을 읽으라고 하면 꼭 띄어쓰기대로 띄어 읽는다. 오류다. 학교에서 문법은 배웠어도 어법은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저 띄어쓰기대로 띄어 읽으면 되는 줄 알고 흔히들 그리 읽는다. 관형사에 명사가 이어지는 문장에서 문법에서는 띄어 쓰는 게 맞고, 어법에서는 붙여 읽는 게 맞다. 관형사가 이 사람이 아닌 그 사람, 혹은 그 사람이 아닌 저 사람이라는 ‘선택적 성격’을 지닐 땐, 붙여 읽어야 한다. “아니, ‘이양반이’ 이거 왜 이래”처럼 말이다. 시로 예를 들어 보자. 한글날도 곧 다가오니, 오세영 시인의 <아아, 훈민정음>이 좋겠다. “그러나 이 땅, 그 수많은 종족의 수많은/ 언어 가운데서 과연/ 그 어떤 것이 신(神)의 부름을 입었을 손가./ 마땅히 그는 한국어일지니” 이 시에서 ‘이 땅’은, “이땅”처럼 관형사와 명사를 붙여 읽어야 한다. ‘이 땅’은 이 나라를 뜻한다. 다른 나라가 아닌 이 나라(=우리나라)를 뜻한다. 선택적 성격을 지닌 지시 관형사 ‘이’에 이어진 명사는, 반드시 붙여 읽어야 한다. 자연스러운 낭독과 낭송은 거기서 나온다. 그것이 포즈의 기본이다.

신발을 사러 갔다. 주인장이 파란 신발을 들어 보이며 “이 신발로 드릴까요?” 하고 물었더니 “아뇨, 저 빨간 신발로 주세요” 하며 손님이 말했다. 앞 문장의 ‘이 신발’은, 붙여 읽는 게 당연하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선택적 성격이니까. 그러면 뒤 문장 “저 빨간 신발”은, 어떻게 읽을까. 이때는, “저/빨간신발”처럼 관형사 다음에 띄어서 읽어야 한다. 관형사와 명사 사이에 수식어가 있을 땐, 띄어서 읽어야 하는 게 포즈의 원칙이다. 위의 오세영 시 속 ‘그 수많은 종족’도 역시 “그/수많은종족”처럼 관형사 다음에 띄어야 한다. 관형사와 명사 사이에 수식어가 있을 때는 띄어 읽어야 자연스럽다. 그것이 포즈의 기본이다.

몇 가지 정리하면서 익혀 보자. ‘이신발(0), 이/신발(×)’. ‘이땅의아들(0), 이/땅의아들(×)’. ‘저/빨간신발(0), 저빨간신발(×). ‘저산(0), 저/산(×)’. 저/뾰족한산(0), 저뾰족한산(×). ‘형이라는 그사람도(0), 형이라는 그/사람도(×)’, 그/형이라는 사람도(0), 그형이라는 사람도(×). 헷갈릴 수도 있다. 그래도 조금 익혔으면, 다시 시를 보고 읽어보면서 정확한 포즈로 읽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를 몸으로 느껴보자. 이상화 시인이 스스로 자신의 대표 시라고 한 <역천>의 첫 연 첫 행을 보자. “이때야말로 이 나라의 보배로운 가을철이다” 한 번은 “이때야말로 ‘이나라’의 보배로운 가을철이다”로, 또 한 번은 “이때야말로 ‘이/나라’의 보배로운 가을철이다”로 읽어보고 그 차이를 몸으로 느껴보자. 다음은 <역천> 3연의 1행이다. “이런 때 이런 밤 이 나라까지 복되게 보이는 저편 하늘을” 역시 “이런 때 이런 밤 ‘이나라까지’ 복되게 보이는 저편 하늘을...”으로 한 번, “이런 때 이런 밤 ‘이/나라까지’ 복되게 보이는...”으로, 또 한 번 읽어보고 차이를 생각해보자. 포즈의 기본을 느껴보자.

‘관형사+명사로 된 문장에서 띄어읽기’의 마지막으로 ‘관형사에 선택의 의미가 없는 경우’를 보자. 이때는 관형사 다음에 띄어 읽어야 한다. “그 술 좀 그만 마셔라” 라는 문장에서의 관형사 ‘그’는, 선택의 의미가 없다. 이때의 술은, 소주·맥주·양주 중의 하나가 아니라, 단지 관습에 따라 붙인 관형사이지 선택의 성격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술 좀 그만 마셔라”처럼 읽어야 한다. 그것이 포즈의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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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가의 소소한 단상] 포즈(pause), ‘띄어읽기’의 실제1 - ‘관형사+명사’로 된 문장

“아니, ‘이 양반’이 이거 왜 이래?” 맥주집 앞에서 시비가 붙은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이 문장에서 관형사 ‘이’에 이어진 명사 ‘양반’은, 붙여 읽어야 한다. 아무 생각 없이 말할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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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단상] ― ‘시낭송가의 발음 이야기’

  □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 ‘경건(敬虔)하다/경건(勁健)하다’

  소리는 똑같습니다만 그 뜻이 서로 다른 말 중에는, ‘경건(敬虔)하다’와 ‘경건(勁健)하다’가 있습니다. ‘경건(敬虔)하다’는 “공경하며 삼가고 엄숙하다”라는 의미고, ‘경건(勁健)하다’는 “굳세고 튼튼하다, 굳세고 힘차다”라는 뜻입니다.

  ‘경건(敬虔)하다’의 ‘경(敬)’은 ‘삼가고 공경하다’는 의미고, ‘건(虔)은 ’공경하는 마음으로 삼가 조심한다‘는 뜻을 품습니다. ‘경(敬)’은 거성으로 장음이며, ‘건(虔)은 평성으로 단음입니다. 그래서 사전에는, [경ː건하다]처럼 ‘경’을 길게 발음하라고 장음 기호를 넣습니다. 당연합니다. 거성은, 상성 다음으로 긴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상성과 거성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길게 발음되는 소리입니다. 물론 첫음절[=어두(語頭)]에서만 그러합니다. 장음은 어두에서만 실현되고, 뒤에 놓인 장음은 단음화됩니다. (그러나 복합어에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비어두에서도 장음이 가능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말의 장단은 참으로 변화무쌍하답니다. 고정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변화합니다.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경건(勁健)하다’의 ‘경’은, ‘세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굳셀 경’이라고 합니다. 이 ‘굳셀 경’도 ‘공경 경’과 마찬가지로 거성입니다. 그러니까 장음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경건(敬虔)하다’처럼 첫음절 ‘경’을 길게 [경ː건하다]로 발음됩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사전에서는, <국립국어원표준대사전>을 비롯해 <네이버 사전>, <다음 사전>, 심지어는 <표준한국어발음사전>조차도 저 ‘경건(勁健)하다’의 ‘경’에 장음 기호를 넣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단음으로 발음하라는 것인데, 어찌 ‘거성’을 단음으로 읽으라는 건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개인이 낸 여느 사전은 몰라도, <국립국어원>에다가는 “얼른 확인해보고 고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될 테니까요. 혹여 저 거성으로서의 장음인 ‘경(勁)’을 단음으로 발음해야 하는 근거가 있다면 그를 제시해야 합니다. 한 가지 더. 두 형용사 ‘경건하다’는, 경건이라는 어근에 ‘~하다’가 결합한 ‘~하다 형용사’입니다. 이 ‘하다’의 음장은, ‘단+장’ 구조입니다. 그러니까 ‘하’는 짧은소리고, ‘다’는 긴소리입니다. 그런데 단음은, 장음 앞에서 돌연 짧아지며 아연 높아집니다. 이는 우리말에서 예외 없는 법칙과도 같습니다. 이를 ‘평고조(平高調)’라고 합니다. 단음은 짧기만 하게 아니라, 그 성격이 낮고 잔잔하며 평평한 소리라서 ‘평성’이라 불립니다. 그런데 저 단음이 장음 앞에선 저리 변화되어 돌연 높아집니다. 우리말의 변화무쌍이라니요~! 바로 거기서 우리말의 가락이 나옵니다. 그런데 사전에서 제공하는 발음은, 당췌... 말은 말과 글의 제 성격대로, 있는 그대로 발음되어야 합니다. 사전의 발음도 당근, 수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이 두 형용사 경건하다는 모두 표현적 장음이 가능한 형용사입니다. 하다 형용사에서는 ‘하’ 앞의 음절에 장음을 둘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경ː건::하다:]로 발음될 수 있습니다. 물론 강조하려고 할 때만 표현적 장음이 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서 셋째 음절 ‘하’는, 평고조 현상에 따라 ‘극단음’으로 아주 짧게 발음된다는 것, 잊지 않으셨지요~?! 이것이 우리말이고, 우리말의 가락이며 리듬입니다.

그러므로 ‘경건(勁虔)하다’와 ‘경건(勁健)하다’ 둘 다 [경ː건::하다:]처럼 첫음절 경을 길게 장음으로 발음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저 둘은 구별되지 않습니까?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전혀 구분되지 않으면 곤란하겠지요. 소리의 길이와 높이 강세는 같지만, 이 둘은 구별해야 합니다.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장단의 문제로 해결할 게 아닙니다. 망치만 든 놈은 모든 게 못으로만 보이겠지만, 우리는 문제가 다르면 그 해결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는 걸 압니다.
  형용사 중에는 감정 형용사가 있습니다. 저 두 형용사는, 바로 감정을 담아 발음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만 두 형용사가 구분되어 적확하게 전달될 수 있습니다. ‘경건(敬虔)하다’는, “공경이 담긴 정서”로, ‘경건(勁健)하다’
’는 “강직하고 굳센 정서”로 발음해야 합니다.
  정서(emotion)는, ‘어조(語調)’에서 나옵니다. 이 어조를 일러 ‘목소리’라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어조는, 또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건 바로 ‘태도’에서 나옵니다. 그럼 ‘태도’는? 태도는, 발화자와 대상과의 관계에서 나옵니다. 대상이 발화자보다 우월하고 본받을만하면 존경의 태도와 어조(=정서)가 나옵니다. 대상이 여리거나 여리다고 느낀다면 여린 어조가 나올 테고, 대상이 굳세다면 강한 어조가 나옵니다. (누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를 수도 있으므로 어조는 주관적일 수도 있습니다.)
   ‘경건(敬虔)하다’는 공경의 정서로, ‘경건(勁健)하다’는 강직한 어조로 발음해야 합니다. 이는 감정을 자제해야 하는 아나운서에게도 적용됩니다. 감정 형용사만큼은, 감정이 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우나 배우 그리고 시낭송가들은 감정 형용사의 감정표현에 더욱 각별해야 합니다.

   감정(emotion)에 대한 정의와 개념, 그리고 표현방법까지 써야 하겠지만, 글이 길어져서 이만 줄입니다.

   경건(敬虔)하고, 경건(敬健)한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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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시] ㅡ '무명 전사'

■ 북로군정서의 기관총 사수 '최인걸'을 기리다

지금으로부터 103년 전 오늘.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전쟁에서 크게 이기는 걸 두고 '대첩'이라고 합니다.

소년병 최인걸은, 기관총 사수로 그 기관총을 몸에 친친 묶고, 왜적과 끝끝내 싸우다가 장열하게 산화했습니다. 이는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지만, 역사적 사실입니다.

10월이 다 가기 전에 한 번 읽을 만한 시입니다. 이 시는 도종환 시인의 서정시집 <접시꽃 당신>에 실려서 그런지 대개 그냥 지나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다시 드러내고픈 시입니다.

   다시 부르는 기전사가 / 도종환

   그대들 지금도 날 기억하는가
   장백산 사십 척 골짝에 누워
   어랑촌, 백운평 원시림 속 떠돌며
   압록강 얼음 위에 은빛 달 뜰 때마다
   끓어오르는 울음 살 아린 바람더미로
   되살아나고 되살아나는 내 핏발산 목청
   그대들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가
   시월 삭풍에 우우우 북간도의 겨울은 몰려오는데
   야영화 달군 돌 위에  옥수수가루 콩가루
   짓이겨 지짐하여 허기를 채우고
   키넘는 활엽으로 등 녹이고 가슴 덮으며
   사흘 낮 사흘 밤을 꼬박 새워 싸우며
   우리는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었지
   총대에 내 몸을 칭칭 감아 동여매고
   장고봉 넘어 치내려온 관동군, 만철 수비대
   수백여 구의 뼛속에 박힌 분노가 되어
   영영 돌아오지 않고 지금도 썩어 있는
   아, 나는 북로 군정서 소년병 최인걸
   자랑스런 대한독립군의 기관총 사수였다
   지금도 나는 꼭 한 번만 더 살아나고 싶구나
   언제고 한 번만 더 살아 일어나서
   하나 남은 기관총에 다시 허리를 묶고
   끊임없이 이 땅에 밀려오는 저 적들의 가운데로
   방아쇠를 당기며 달려가고 싶구나
   밀림 속에 숨어 아직도 돌격 소리 그치지 않는
   저 새로운 음모의 한복판을 향해
   빗발치는 탄알소리로 쏟아지고 싶구나
   늦가을달 높이 뜬 삼천리 반도를 오가며
   그때 부르던 기전사가 다시 부르고 싶구나.

도종환, <접시꽃 당신>, 실천문학사, 2011.

*기전사가(祈戰死歌): 청산리전투 당시 독립군이 부르던 군가로 싸우다 죽기를 기원하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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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요정_니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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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실제》(2019), 반기룡의 《재미있는 시낭송 교실》(2016)과 《즐거운 시낭송 교실》(2017)과 《재미 흥미 의미 있는 시낭송 교실》(2018), 황봉학의 《시낭송 교본》(2019), 신승희의 《전문 시낭송 교실: 시낭송 이론과 실제》(2020), 한우수·서랑화의 《시낭송 내비게이션》(2020) 등 총 15권이 나왔다.

시낭송계는 이러한 성과를 이어 가야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나온 시낭송 관련 도서에 대한 꼼꼼한 분석과 비평도 반드시 선행되어야 발전의 밑절미가 될 것이다.

시낭송을 학문적 틀로 접근하는 게 아직은 생소할 수 있겠지만, 이제는 휴지(休止, pause), 음운론, 어조, 액팅화술, 특히 앙리 메쇼닉의 ‘리듬(=프로조디, prosodie)’에 대한 제반 학문적 연구 성과를 시낭송에 접목해 이론체계를 세울 때다. 사실 늦었다. 시낭송의 과거와 현재를 톺아볼 때, 지금 가장 시급한 과제가 이론체계를 정립하는 것이다. 특히 음운론에 따른 완전장음/반장음/장고모음/보상적 장음/표현적 장음의 문제, 현대시의 리듬은 어디서 어떻게 생성되고 조직되는가, 띄어 읽기와 붙여 읽기, 발화의 프로세스 등은 참으로 시급하다. 에드워드 히르시가 말하길 “시는 노래와 말 사이를 거닐어 왔다.” 최소한 위의 네 가지를 구현해야 시낭송다운 ‘시낭송’이 가능하다고 본다. 현대시의 낭송은 사실 정형시로서의 노래도, 내래이션도, 이야기도, 구연동화도 아니다. 산문 읽기도 아니다. ‘말과 노래 그 사이’다. 그것은 시(詩)마다의 음운과 포즈와 리듬에 따라 읽었을 때 가능하다. 그렇지 않고선 시낭송을 하게 되면, 이는 마치 악보를 못 읽는 사람이 노래하는 것과 같을 수도 있다.

우리는 이제 시낭송의 새 지평을 열어 우리에게 다가올 시낭송의 르네상스를 마중 나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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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가의 소소한 단상] 궁리하는 시낭송, 시낭송의 새 지평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

우리나라의 시낭송 역사는 50년이다. 짧게 잡아도 30년. 재능시낭송대회가 매년 열리기 시작한 해가 1991년부터다. 최근에는 1년에 110여 개의 시낭송대회가 열린다. 수상자 일부에겐 시낭송가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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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시] ㅡ '류기택의 벽화'

   벽화 / 류기택

   꽃 피는 생각이 조급했을 리 없다
   봄이 간다고 꽃이 끝났을 리 없다

   사랑이 떠났다고 아니 올 리 없다

   이제 사철 아무것도 없을 리 없다

   꽃도
   철 따라 피다, 피다
   다 지고 없으면
   마지막으로 눈꽃이 피었다

   어떻게든 벽이 피지 않을 리 없다

   그럴 리 없다

오늘 아침 이 시를 읽었습니다. 이주자천 선생님께서 어제 올리신 시입니다.

류기택 시인 시의 리듬이 참 좋습니다. <벽화>에서 시의 리듬은, 무엇보다  "~ㄹ 리 없다"의 반복으로 생성됩니다.
리듬은, 정지가 아닌 흐름 속에서 동일한, 또는 유사한 것들이 반복될 때, 그때 생겨납니다. 이 시에서 "~ㄹ 리 없다"가 여섯 번 반복됩니다.

의존명사 "리"는, 다음과 같이 앞의 관형사형 '~ㄹ'과 붙여 읽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쓸 때는 띄어쓰고 읽을 때는 붙여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정형 역시 붙여 읽어야 합니다. '~지 않/~지 말'도 쓰땐 띄어 쓰고 읽거나 말을 할 땐 붙여야 합니다. 한국인은 발화할 때 다 그리합니다.

"조급했을리없다/끝났을리없다/아니 올리없다/없을리없다/피지않을리없다/그럴리없다"

'~ㄹ 리'는 '~ㄹ리'처럼 붙여 읽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ㄹ'이 중첩됩니다. ''~ㄹ'의 종성과 '리'의 초성 'ㄹ'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종성으로 쓰인 글자가 장음화됩니다. "아라"의 "아"보다 "알라"의 "알"이 더 길게 발음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을/올/럴"이 장음화되는 것입니다. 이를 음운론에서 'ㄹ 중첩자음의 장음화'라고 한답니다. 현대시의 리듬을 동일한 음소의 반복에서 구합니다만, 최근의 연구 경향은 우리말 그 자체에서 얻으려는 노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말 그대로 쓰인 말의 성격 그대로 발음한다면 그 자체의 리듬이 구현되겠습니다.

이 시에서 유성음 "ㄹ"의 반복은, 유장한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초성으로 쓰인 탄설음과 종성으로 쓰인 설측음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ㄹ 리"와 함께 "사철"의 "철", "철 따라"에서 "철"의 "ㄹ"과 "따라"의 "라" 역시 이 시에서 리듬의 동심원이 됩니다. 이것들이 강세를 품은 리듬의 거점이 되는 것이죠.

류기택 시인의 <벽화>는, 리듬적으로 성공한 시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시는 노래로 만들어도 좋은 노래가 될 개연성이 높습니다. 리듬을 생성하는 게 또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양순 파열음 "벽"의 "ㅂ"과 "ㅍ" 또한 반복되며, 리듬을 맹그러내지요~?!

현대시의 리듬은, 핵심 시어의 반복에 있습니다. '벽에 피는 꽃'의 "ㅂ"과 "ㅍ"의 반복이 그러하지요.

'벽에도 꽃이 필'거라 확신하는 저 시적 주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눈이 푹푹 나린다"보다 좋아질 듯합니다.

참 리드미컬한 시입니다. 결코 주례사 평론 따윈 아닙니다. 객관적 사실에 대한 진술입니다. 솔직히 엊그제 함께 막걸리를 한잔하기는 했지만, 결코...!^^

이주자천 선생님께서 참 좋은 시를 알려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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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요정_니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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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立秋)] ㅡ '우주의 리듬'

우리는 이제 곧 "가을이라는데, 왜 이리 덥지~?!"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봄이 오기 전 더 춥고, 봄에 꽃샘추위 없이 지나가는 일도 없습니다. 날이 밝기 전에 오히려 더 캄캄해집니다.

이러한 자연 현상을 '구조적 지연'이라 하고, 동서양의 음악에서도 이를 '구조적 강박'이라 한답니다. 교향곡에서도 절정 바로 전에 지연되는 리듬이 반복되고, 우리 가락에서도 역시 그런답니다. 특히 시조에서 종장의 둘째 마디가 예외없이 길어집니다. 음절수가 많아질 뿐 아니라 당연히 마디의 길이도 길어지죠. 구조적 지연이라는 자연 현상을 닮은 구조적 강박이라는 리듬이랍니다.

저 '구조적 지연'으로 가을의 첫 절기 '입추'까지는 내내 한여름처럼 덥겠지요. 아침 저녁의 선선함만 없으면 여름처럼 덥습니다. 그러나 덥다고 가을이 아닌 건 아니죠. 입추 지나 처서 오면 가을이 좀 더 느껴집니다.

처서는 "하늘에선 뭉게구름을 타고 오고,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을 타고 온다"는 옛말이 있는데, 정말이지 처서 때엔 하늘에 뭉게구름이 참 많이도 나타납니다. 주로 저운층으로 아주 낮게 뜬 구름이라서 폴짝 뛰어올라 잡아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킵니다. 풀숲에 풀벌레 소리며, 지하실 귀뚜라미 울음 소리도 들립니다. 그래서 그런지 처서 때가 참 좋습니다. 처서를 앞둔 입추도 좋고요.


출처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pfbid02h64cZ3DRJsFbr2wdWoXHiMXHZvqZXsariLp3Hi1Ka26iAwaPkJNoNmvyUa3qTfznl&id=100054589251893&mibextid=Nif5oz

Posted by 시요정_니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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