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쳐 읽는 시】― ‘<수라>와 <거미의 생에 가 보았는가>’
김용택의 시 「그 여자네 집」은, 박완서 소설 『그 여자네 집』 도입부에 시 전문이 그대로 실렸다. 이병주 소설가도 소설에 시를 많이 수용하는 편이다. 그의 소설에서 장편 『망향』, 대하 장편 『산하』, 중편 『세우지 않은 비명』에 백석 시 「적막강산」을 버무려 놓았다.
안수찬 시인은 백석의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에 대한 공감과 비판의 해석을 버무려 12연에 이르는 장시 「갈매나무」라는 시를 썼다. 그리고 김소진은 『갈매나무를 찾아서』라는 소설을 썼는데, 이 소설의 구성 축은 안수찬의 「갈매나무」의 창작과정 그대로라고 한다.
안도현 시인은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쓰고, 한편 정일근 시인은 「속(續)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환약(幻藥)」를 썼다. 안도현 시인은 또「백석 선생의 마을에 가서」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안수찬, 안도현, 정일근 시인의 시는,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과 겹쳐 읽을 만하다.
김연수의 장편 『일곱 해의 마지막』은, 시 창작을 접었던 백석이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 1956년에서 1963년까지 7년 동안, 백석의 삶을 따라 전개되는 소설이다.
“하얀 벽은 스크린이 되어 제일 먼저 여우난골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사는 큰집에 신리 고모의 딸 이녀, 토산 고모의 딸 승녀, 아들 승동이, (중략) 또 잔고기를 잘 잡던 앞니 뻐드러진 주막집 동갑내기 아이 범이와 장꾼들을 따라와 엄지의 젖을 빠는 망아지와 물쿤 개비린내와 가지취 냄새를 펼쳐 보이곤 했다.” (김연수, 『일곱 해의 마지막』, 문학동네, 2020, 177~178면).
김연수는, 흰 바람벽이 마치 스크린인 양 거기 그리운 존재들이 비친다는 「흰 바람벽이 있어」의 참신한 발상법을 빌려 「여우난곬족」, 「酒幕」, 「오리 망아지 토끼」, 「비」, 「女僧」 등의 내용을 반추한다. 백석 시에 대한 깊은 이해 큰 애정이 80년 세월을 넘어 선배 시인의 시와 후배 소설가의 소설을 엮어 한몸이 되게 했다.
그리고 백석의 「수라(修羅)」를 패러디한 시가 있다. 고형렬 시인의 「거미의 생에 가 보았는가」가 그것다. 오늘 지인께 이 시를 올리며 낭독까지 해주셨다. 기왕이면 백석의
「수라」와 「거미의 생에 가 보았는가」
를 함께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수라(修羅) / 백석
거미 새끼 하나 방바닥에 내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느젠가 새끼 거미 쓸려 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 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 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라운 종이에 받아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와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 출처: 백석, 『정본 백석 시집』, 고형진 엮음, 문학동네, 2008, 54면.
거미의 생에 가 보았는가 / 고형렬
천신만고 끝에 우리 네 식구는 문지방을 넘었다
아버지를 잃은 우리는 어떤 방에 들어갔다
아뜩했다 흐린 백열등 하나 천장 가운데 달랑 걸려 있어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간혹 줄이 흔들렸다
우리는 등을 쳐다보면서 삿자리를 건너가고 있었다
건너편에 뜯어진 벽지의 황토가 보였다 우리는 그리로
건너가고 윙 추억 같은 풍음이 들려왔다
귓속의 머리카락 같은 대롱에서 바람이 슬픈 소리를 냈다
모든 것은 이렇게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인간들에게 어떤 시절이 지나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방에 늙은 학생같이 생긴 한 남자가
검은 책을 보고 있었다 우리는 그 남자의 바로
책 표지 밑을 지나가고 있었다
머리를 뒤로 넘긴 것 같은 조금 수척한 남자가 멈칫했다
앞에 가던 형아가 보였던 모양이다 남자는
형아를 쓸어서 밖으로 버리고 다시 책을 보기 시작했다
모친은 그 앞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아들이
사라진 지점에서 어미는 두리번거리고 서 있었다
그때 남자가 모친을 쓸어 받아 문을 열고 한데로 버렸다
먼지처럼 날아갔다 남자는
뒤따라가는 아우에게 얇은 종이를 갖다 대는 참이었다
마치 입에 물라는 듯이
아우는 종이 위에 올라섰다 순간 남자는
문을 열고 아우를 밖으로 내다 버렸다
나는 뒤에서 앙 하고 소리치며 울었다 그 울음이
들릴 리가 만무했지만
그때 남자가 무언가 골똘한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
혈육들은 그 후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다
바람 소리만 그날 밤새도록 어디론가 불어 갔다 어둠 속
삿자리 밑에서 나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알 수 없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슬프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이것이 우리 가족의 긴 미래사였다
남자는 단지 거미를 죽이지 않고 내다 버렸지만
그날 밤 나는 찢어진 벽지 속 황토 흙 속으로 들어갔다
※ 출처: 고형렬,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창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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