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은 시] ㅡ '무명 전사'
■ 북로군정서의 기관총 사수 '최인걸'을 기리다
지금으로부터 103년 전 오늘.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전쟁에서 크게 이기는 걸 두고 '대첩'이라고 합니다.
소년병 최인걸은, 기관총 사수로 그 기관총을 몸에 친친 묶고, 왜적과 끝끝내 싸우다가 장열하게 산화했습니다. 이는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지만, 역사적 사실입니다.
10월이 다 가기 전에 한 번 읽을 만한 시입니다. 이 시는 도종환 시인의 서정시집 <접시꽃 당신>에 실려서 그런지 대개 그냥 지나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다시 드러내고픈 시입니다.
다시 부르는 기전사가 / 도종환
그대들 지금도 날 기억하는가
장백산 사십 척 골짝에 누워
어랑촌, 백운평 원시림 속 떠돌며
압록강 얼음 위에 은빛 달 뜰 때마다
끓어오르는 울음 살 아린 바람더미로
되살아나고 되살아나는 내 핏발산 목청
그대들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가
시월 삭풍에 우우우 북간도의 겨울은 몰려오는데
야영화 달군 돌 위에 옥수수가루 콩가루
짓이겨 지짐하여 허기를 채우고
키넘는 활엽으로 등 녹이고 가슴 덮으며
사흘 낮 사흘 밤을 꼬박 새워 싸우며
우리는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었지
총대에 내 몸을 칭칭 감아 동여매고
장고봉 넘어 치내려온 관동군, 만철 수비대
수백여 구의 뼛속에 박힌 분노가 되어
영영 돌아오지 않고 지금도 썩어 있는
아, 나는 북로 군정서 소년병 최인걸
자랑스런 대한독립군의 기관총 사수였다
지금도 나는 꼭 한 번만 더 살아나고 싶구나
언제고 한 번만 더 살아 일어나서
하나 남은 기관총에 다시 허리를 묶고
끊임없이 이 땅에 밀려오는 저 적들의 가운데로
방아쇠를 당기며 달려가고 싶구나
밀림 속에 숨어 아직도 돌격 소리 그치지 않는
저 새로운 음모의 한복판을 향해
빗발치는 탄알소리로 쏟아지고 싶구나
늦가을달 높이 뜬 삼천리 반도를 오가며
그때 부르던 기전사가 다시 부르고 싶구나.
도종환, <접시꽃 당신>, 실천문학사, 2011.
*기전사가(祈戰死歌): 청산리전투 당시 독립군이 부르던 군가로 싸우다 죽기를 기원하는 내용입니다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pfbid02aiRpQNywFp6Y97hoPtm5sa4XyNJdTVy6wDVhwgJtyKR6sZwJudtRUGFdjDvDe4gbl&id=100054589251893&mibextid=Nif5o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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