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은 시] ㅡ '류기택의 벽화'
벽화 / 류기택
꽃 피는 생각이 조급했을 리 없다
봄이 간다고 꽃이 끝났을 리 없다
사랑이 떠났다고 아니 올 리 없다
이제 사철 아무것도 없을 리 없다
꽃도
철 따라 피다, 피다
다 지고 없으면
마지막으로 눈꽃이 피었다
어떻게든 벽이 피지 않을 리 없다
그럴 리 없다
오늘 아침 이 시를 읽었습니다. 이주자천 선생님께서 어제 올리신 시입니다.
류기택 시인 시의 리듬이 참 좋습니다. <벽화>에서 시의 리듬은, 무엇보다 "~ㄹ 리 없다"의 반복으로 생성됩니다.
리듬은, 정지가 아닌 흐름 속에서 동일한, 또는 유사한 것들이 반복될 때, 그때 생겨납니다. 이 시에서 "~ㄹ 리 없다"가 여섯 번 반복됩니다.
의존명사 "리"는, 다음과 같이 앞의 관형사형 '~ㄹ'과 붙여 읽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쓸 때는 띄어쓰고 읽을 때는 붙여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정형 역시 붙여 읽어야 합니다. '~지 않/~지 말'도 쓰땐 띄어 쓰고 읽거나 말을 할 땐 붙여야 합니다. 한국인은 발화할 때 다 그리합니다.
"조급했을리없다/끝났을리없다/아니 올리없다/없을리없다/피지않을리없다/그럴리없다"
'~ㄹ 리'는 '~ㄹ리'처럼 붙여 읽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ㄹ'이 중첩됩니다. ''~ㄹ'의 종성과 '리'의 초성 'ㄹ'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종성으로 쓰인 글자가 장음화됩니다. "아라"의 "아"보다 "알라"의 "알"이 더 길게 발음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을/올/럴"이 장음화되는 것입니다. 이를 음운론에서 'ㄹ 중첩자음의 장음화'라고 한답니다. 현대시의 리듬을 동일한 음소의 반복에서 구합니다만, 최근의 연구 경향은 우리말 그 자체에서 얻으려는 노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말 그대로 쓰인 말의 성격 그대로 발음한다면 그 자체의 리듬이 구현되겠습니다.
이 시에서 유성음 "ㄹ"의 반복은, 유장한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초성으로 쓰인 탄설음과 종성으로 쓰인 설측음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ㄹ 리"와 함께 "사철"의 "철", "철 따라"에서 "철"의 "ㄹ"과 "따라"의 "라" 역시 이 시에서 리듬의 동심원이 됩니다. 이것들이 강세를 품은 리듬의 거점이 되는 것이죠.
류기택 시인의 <벽화>는, 리듬적으로 성공한 시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시는 노래로 만들어도 좋은 노래가 될 개연성이 높습니다. 리듬을 생성하는 게 또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양순 파열음 "벽"의 "ㅂ"과 "ㅍ" 또한 반복되며, 리듬을 맹그러내지요~?!
현대시의 리듬은, 핵심 시어의 반복에 있습니다. '벽에 피는 꽃'의 "ㅂ"과 "ㅍ"의 반복이 그러하지요.
'벽에도 꽃이 필'거라 확신하는 저 시적 주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눈이 푹푹 나린다"보다 좋아질 듯합니다.
참 리드미컬한 시입니다. 결코 주례사 평론 따윈 아닙니다. 객관적 사실에 대한 진술입니다. 솔직히 엊그제 함께 막걸리를 한잔하기는 했지만, 결코...!^^
이주자천 선생님께서 참 좋은 시를 알려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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