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산 박두진은 기독교 시인이다. 그는 일생 동안 신앙의 지향점과 삶의 지향점, 시의 지향점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을 추구했다. 그는 자신의 신앙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대전제 안에서 문학을 선택했다. 박두진은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청교도적인 철저한 금욕 생활의 신조와 인간적이고 감각적인 쾌락을 가져다주는 시의 생활이 서로 일치할 수 있느냐의 문제”를 놓고 치열하게 고민했다. 시인의 고백대로 한다면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해답을 구하려” 한 끝에, “시를 읽고 쓰는 것이 신앙과 분리된 것이 아니며, 시를 통해 궁극적으로 신에게 영광을 돌릴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전 생애에 걸쳐 신앙과 삶과 시의 일치를 추구하게 되었다.
박두진은 시 세계의 단계를 자연, 인간, 신의 세 단계로 정했다. 그리고 시를 통해 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시적 궤적을 완성하기 위해 치열하고 정밀한 추구를 멈추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자연은 말 그대로 자연”이었고, “인간은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와 민족, 인류와 세계, 시대와 역사적 현실을 포괄하는 카테고리”로 인간을 구심점으로 한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개념이었다. “신의 세계는 기독교 사상과 그 신앙, 신학을 바탕으로 한 지성·지고·지애의 세계, 창조주 하나님과 인류의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와 그 말씀”을 뜻하는 것이었다. 박두진에게는 “자연을 노래하는 것도 신에게 영광과 찬미를 돌리기 위해서요, 인간과 사회를 주제로 쓰는 것도, 다 궁극으로는 신의 긍휼과 자비와 그 빛을 증거하고 갈망하는” 것이었다.
박두진은 시인으로서 일생 동안 한국 근현대사의 모든 불행과 비극을 시적 계기와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시인의 눈으로 시대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 속에서 영원하고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했다. ‘당시대적 대결’과 ‘영시대적 탐구’를 아우르는 시인의 고뇌를 시로 남기며 시인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한 시인으로서 시대와 역사를 시적으로 수용하고 창조하며 투명성과 초월성을 견지한 것이다.
그는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 속에서도, 이 땅에 반드시 진리가 이루어지고, 참된 자유가 획득되고, 신의 섭리가 영원한 사랑 가운데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이 모든 비극은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신의 섭리 속에서 더 큰 역사적 성취를 이루기 위한 시련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자신의 시를 작은 희생의 제물로 그 제단에 바치고자 했다.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 속에서, 박두진의 시는 자연으로 민족의 시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인간의 세계를 파고들어 피땀을 흘리며 악의 현실과 맞서 투쟁했다. 마침내 박두진의 시는 태초부터 영원까지 이어지는 큰 섭리 속에서 자신을 둘러싼 격변을 수용하며, 자신의 형상을 다듬고 영원을 기다리는 신의 세계에 이르렀다. 신의 세계에 이르러, 시작이자 마침이며 알파와 오메가인 신의 세계와 자연, 인간의 역사가 하나로 통합되었다.
200자평
일제 치하에서 한국전쟁, 독재로 이어지는 고통의 근현대사에서 박두진은 눈감지 않는다. 시대의 현실을 직시하고 이 어둠을 밝혀 줄 해를 추구한다. 바로 자연이자 진리인 신의 섭리다. 그가 해의 시인이 된 이유다.
지은이
혜산 박두진은 1916년 3월 10일 경기도 안성군 안성읍 보개면 봉남리 360번지에서 태어났다.
1930년대 말 ≪아≫라는 동인지에 <북으로 가는 열차>를, ≪웅계≫라는 동인지에 <무제>를 실었다. 그리고 1939년 ≪문장≫에서 <향현>, <묘지송>을 시작으로 <낙엽송>, <의>, <들국화>로 3회 추천을 완료해 등단했다.
1940년 이후 일본의 민족 말살 정책이 더욱 집요해졌다. ≪문장≫이 폐간되고 모국어로 시를 써도 발표할 지면이 없었다. 이 시기에 쓴 것이 후에 ≪청록집≫에 실린 시들이다. 안양에서 광복을 기다리고 있던 박두진은 8·15를 맞아 서울로 올라왔고, 을유문화사의 아동문화협회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문장≫ 추천 동기인 조지훈, 박목월을 만났고, 1946년에 ≪청록집≫을 냈다.
6·25가 일어나자 박두진은 일단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인 안성으로 내려갔다. 1·4 후퇴 때는 조지훈, 박목월, 이상로, 유주현 등의 문인들과 함께 대구로 내려가 대구 공군 종군 문인단으로 활동했다. 박두진은 전시에 쓴 시를 모아 대구에서 시집 ≪오도≫를 냈다. 당시 쓴 수필들은 서울 수복 직후에 낸 ≪시인의 고향≫에 수록되었다. 서울 환도의 뒤를 따라 돌아오기 직전 대구에서 박두진은 ≪신천지≫에 <어느 벌판에서>를 발표했다.
박두진은 일제 시대부터 8·15, 6·25, 4·19, 5·16 등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을 경험하며, 정신적 내면적 주체이자, 민족을 구성하는 한 개인으로서 민족적 체험을 시로 승화시켰다. 해방 전에서 그 직후까지 시대의 전환점에서 영원한 이상의 성취를 갈망한 것이 첫 시집 ≪해≫였다면, 6·25의 민족적 비극 앞에서 민족의 속죄를 위해 피땀으로 통회한 것이 두 번째 시집 ≪오도≫였다. ≪거미와 성좌≫에는 4·19 혁명과 민족적 분노를, ≪인간 밀림≫과 ≪하얀 날개≫에는 5·16 전후의 시대적 고뇌를 담았다. 그 뒤에 이어지는 ≪고산 식물≫, ≪사도행전≫, ≪수석열전≫ 등은 자신이 속한 시대 속에서 영원을 향해 전진하는 시인의 고독을 다루었고, 영원하고 보편적인 본질을 탐구했다.
엮은이
이연의는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건산리에서 태어났다. 경희대학교 국어국문과에서 <신동엽 시 연구: 전통성을 중심으로>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박사 과정을 수료한 후 기독교 문학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고 개화기 시가부터 윤동주, 박두진, 박목월, 김현승, 구상, 김남조, 박이도 등 기독교 시인들의 작품을 공부해 왔다. 지금은 경희대학교 취업진로지원처에서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차례
해
墓地頌
해의 품으로
香峴
靑山道
雪岳賦
별
道峯
하늘
흰 薔薇와 百合꽃을 흔들며
푸른 하늘 아래
어서 너는 오너라
薔薇의 노래
바다 1
碑
午禱
旗
너
돌의 노래
山脈을 간다
바다의 靈歌
거미와 星座
꽃과 港口
봄에의 檄
江 2
갈보리의 노래 2
詩人共和國
우리들의 기빨을 내린 것이 아니다
비로소 당신 앞에
八月의 江
孤獨의 江
人間 密林
당신의 사랑 앞에
별이 별더러
高山植物
靑瓷象嵌雲鶴文梅甁 緣起
별밭에 누워
예레미야의 노래
不死鳥의 노래
빛의 늪
불
啓示의 꿈
銀河系, 太陽系, 大宇宙天體 無限圖
立體의 늪
野生代
나 여기에 있나이다 주여
갈대
너의 隆起
가을 絶壁
어떤 노을
平原石 異變
가시 면류관
강강수월래
聖 孤獨
대숲
당신의 城
귀뚜라미의 노래
決鬪
新約
詩集
편지
水石 會議錄
書翰體
새에게
일어서는 바다
氷河期
氷壁을 깬다
낙엽, 또는 너무나 머나먼 당신의 가을 길
새와 별
天池
별의 노래 꽃노래
갈보리 獨唱
불덩어리 꿈
天台山 上臺
젊음의 바다
完璧한 山莊
토르소
默示錄
自畵像
天體圖
金剛全圖
꽃들의 행렬
使徒行傳 13
使徒行傳 17
使徒行傳 19
속의 해
불의 씨
아무도 내 노래를
꽃과 별
팔월
시의 나라 시
겨울 나라 시
별, 장미, 꿈
햇덩어리 가슴에 품고 징 치며 가자
수석영가 Ⅳ
수석영가 Ⅺ
당신의 사랑 앞에
영혼의 내 낡은 장막
한나절 오월 햇살
절대 사랑 당신의 품에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연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해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맑앟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뙨 얼굴 고은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딿아, 사슴을 딿아,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딿아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딿아 칡범을 딿아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애뙤고 고은 날을 누려 보리라.
●꽃과 港口
나무는 철을 따라
가지마다 난만히 꽃을 피워 흩날리고,
인간은 영혼의 뿌리 깊이
눌리면 타오르는 자유의 불꽃을 간직한다.
꽃은 그 뿌리에 근원하여
한 철 바람에 향기로이 나부끼고,
자유는 피와 생명에 뿌리 하여
영혼의 밑바닥 꺼지지 않는 근원에서 죽지 않고 탄다.
꽃잎. 꽃잎. 봄 되어 하늘에 구름처럼 일더니,
그 바다—, 꽃그늘에 항구는 졸고 있더니,
자유여! 학살되어 바다 속에 버림받은 자유여!
피 안개에 그므는 아름다운 항구여!
그 소녀와 소년들과 젊음 속에 맥 뛰는
불의와 강압과 총칼 앞에 맞서는
살아서 누리려는 자유에의 비원이
죽음—. 생명을 짓누르는 공포보다 강하고나.
피는 꽃보다 값지고,
자유에의 불꽃은 죽음보다 강하고나.
●水石 會議錄
돌밭의
돌들이 날더러 비겁하다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어리석다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실망했다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눈물 흘리라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피 흘리라고 한다.
돌들이 일제히 주먹질한다.
돌들이 일제히 욕설 퍼붓는다.
돌들이 나를 향해 돌을 던진다.
돌들이 다시 또
돌들이 날더러 일어설 것이냐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도망할 것이냐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숨어 버릴 것이냐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분노하라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불 질러 보라고 한다. 어둠에.
돌들이 날더러 또 사자가 되라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독수리가 되라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말승냥이가 되라고 한다. 차라리.
돌들이 날더러 표범이 되라고 한다. 차라리.
돌들이 날더러 학이나 비둘기
사슴이나 산양이 되라고 한다. 차라리.
아, 돌들이 이번에는
돌들이 날더러 하늘의 별들을 따 와 보라고 한다.
햇덩어리 이글대는
이글대는 햇덩어릴 쏘아 떨어뜨려 보라고 한다.
저 달의 달그림자
눈물의 얼음벌을 쏘아 떨어뜨려 보라고 한다.
돌들이 또 날더러
바다 위로 쩔벙쩔벙 걸음 걸어와 보라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돌로써 빵을 빚고
손으로 돌을 쳐 콸콸 솟는 샘물
모세처럼 돌에서 샘물을 솟게 해 보라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이런 소리 끝까지 듣고 있는 바보
돌들이 날더러 바보가 아니냐고
돌들이 날더러 돌이나 되라고 돌이나 되라고 한다.
그렇게 내가 손들고 일어서서
진실로 한 점
돌이 될 것을 선언하자,
이때 천천만 돌들의
그 돌 속의 불, 돌 속의 물, 돌 속의 빛, 돌 속의 얼음, 돌 속의 시, 돌 속의 꿈, 돌 속의 고독, 돌 속의 눈물, 돌 속의 참음, 돌 속의 힘, 돌 속의 저항,
돌 속의 의지, 돌 속의 평화, 돌 속의 사랑,
돌 속의 자유,
돌 속의 우주, 돌 속의 환희
있는 것 일체 모두
하나로 엉겨,
하늘 천지 땅 천지 둥둥 뜨는 함성
만세 만세 돌들의 외침 끝이 없었다.
●절대 사랑 당신의 품에
하늘 높고 푸르고
햇살 윙윙
눈부신,
이런 날의 넋의 나의
알 수 없는
두려움,
홀로 빙빙
광야처럼
종말처럼 헤매는,
보소서
살피소서
받아 주소서
방황하는 죄인 하나
어쩔 줄을
모르는,
절대 사랑
당신의 품에
안아 주소서.
서지정보
발행일 2013년 11월 20일
쪽수 330 쪽
판형 128*188mm , 210*297mm
ISBN(종이책) 9788966803941 03810 16000원
ISBN(큰글씨책) 9791130452470 03810 32000원
분류 시, 지만지, 한국문학
초판본한국시문학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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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컴북스닷컴
http://commbooks.com/%EB%8F%84%EC%84%9C/%EB%B0%95%EB%91%90%EC%A7%84-%EC%8B%9C%EC%84%A0-%EC%B4%88%ED%8C%90%EB%B3%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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