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산 박두진은 기독교 시인이다. 그는 일생 동안 신앙의 지향점과 삶의 지향점, 시의 지향점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을 추구했다. 그는 자신의 신앙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대전제 안에서 문학을 선택했다. 박두진은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청교도적인 철저한 금욕 생활의 신조와 인간적이고 감각적인 쾌락을 가져다주는 시의 생활이 서로 일치할 수 있느냐의 문제”를 놓고 치열하게 고민했다. 시인의 고백대로 한다면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해답을 구하려” 한 끝에, “시를 읽고 쓰는 것이 신앙과 분리된 것이 아니며, 시를 통해 궁극적으로 신에게 영광을 돌릴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전 생애에 걸쳐 신앙과 삶과 시의 일치를 추구하게 되었다.

박두진은 시 세계의 단계를 자연, 인간, 신의 세 단계로 정했다. 그리고 시를 통해 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시적 궤적을 완성하기 위해 치열하고 정밀한 추구를 멈추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자연은 말 그대로 자연”이었고, “인간은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와 민족, 인류와 세계, 시대와 역사적 현실을 포괄하는 카테고리”로 인간을 구심점으로 한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개념이었다. “신의 세계는 기독교 사상과 그 신앙, 신학을 바탕으로 한 지성·지고·지애의 세계, 창조주 하나님과 인류의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와 그 말씀”을 뜻하는 것이었다. 박두진에게는 “자연을 노래하는 것도 신에게 영광과 찬미를 돌리기 위해서요, 인간과 사회를 주제로 쓰는 것도, 다 궁극으로는 신의 긍휼과 자비와 그 빛을 증거하고 갈망하는” 것이었다.

박두진은 시인으로서 일생 동안 한국 근현대사의 모든 불행과 비극을 시적 계기와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시인의 눈으로 시대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 속에서 영원하고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했다. ‘당시대적 대결’과 ‘영시대적 탐구’를 아우르는 시인의 고뇌를 시로 남기며 시인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한 시인으로서 시대와 역사를 시적으로 수용하고 창조하며 투명성과 초월성을 견지한 것이다.

그는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 속에서도, 이 땅에 반드시 진리가 이루어지고, 참된 자유가 획득되고, 신의 섭리가 영원한 사랑 가운데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이 모든 비극은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신의 섭리 속에서 더 큰 역사적 성취를 이루기 위한 시련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자신의 시를 작은 희생의 제물로 그 제단에 바치고자 했다.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 속에서, 박두진의 시는 자연으로 민족의 시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인간의 세계를 파고들어 피땀을 흘리며 악의 현실과 맞서 투쟁했다. 마침내 박두진의 시는 태초부터 영원까지 이어지는 큰 섭리 속에서 자신을 둘러싼 격변을 수용하며, 자신의 형상을 다듬고 영원을 기다리는 신의 세계에 이르렀다. 신의 세계에 이르러, 시작이자 마침이며 알파와 오메가인 신의 세계와 자연, 인간의 역사가 하나로 통합되었다.



200자평

일제 치하에서 한국전쟁, 독재로 이어지는 고통의 근현대사에서 박두진은 눈감지 않는다. 시대의 현실을 직시하고 이 어둠을 밝혀 줄 해를 추구한다. 바로 자연이자 진리인 신의 섭리다. 그가 해의 시인이 된 이유다.



지은이

혜산 박두진은 1916년 3월 10일 경기도 안성군 안성읍 보개면 봉남리 360번지에서 태어났다.
1930년대 말 ≪아≫라는 동인지에 <북으로 가는 열차>를, ≪웅계≫라는 동인지에 <무제>를 실었다. 그리고 1939년 ≪문장≫에서 <향현>, <묘지송>을 시작으로 <낙엽송>, <의>, <들국화>로 3회 추천을 완료해 등단했다.
1940년 이후 일본의 민족 말살 정책이 더욱 집요해졌다. ≪문장≫이 폐간되고 모국어로 시를 써도 발표할 지면이 없었다. 이 시기에 쓴 것이 후에 ≪청록집≫에 실린 시들이다. 안양에서 광복을 기다리고 있던 박두진은 8·15를 맞아 서울로 올라왔고, 을유문화사의 아동문화협회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문장≫ 추천 동기인 조지훈, 박목월을 만났고, 1946년에 ≪청록집≫을 냈다.
6·25가 일어나자 박두진은 일단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인 안성으로 내려갔다. 1·4 후퇴 때는 조지훈, 박목월, 이상로, 유주현 등의 문인들과 함께 대구로 내려가 대구 공군 종군 문인단으로 활동했다. 박두진은 전시에 쓴 시를 모아 대구에서 시집 ≪오도≫를 냈다. 당시 쓴 수필들은 서울 수복 직후에 낸 ≪시인의 고향≫에 수록되었다. 서울 환도의 뒤를 따라 돌아오기 직전 대구에서 박두진은 ≪신천지≫에 <어느 벌판에서>를 발표했다.
박두진은 일제 시대부터 8·15, 6·25, 4·19, 5·16 등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을 경험하며, 정신적 내면적 주체이자, 민족을 구성하는 한 개인으로서 민족적 체험을 시로 승화시켰다. 해방 전에서 그 직후까지 시대의 전환점에서 영원한 이상의 성취를 갈망한 것이 첫 시집 ≪해≫였다면, 6·25의 민족적 비극 앞에서 민족의 속죄를 위해 피땀으로 통회한 것이 두 번째 시집 ≪오도≫였다. ≪거미와 성좌≫에는 4·19 혁명과 민족적 분노를, ≪인간 밀림≫과 ≪하얀 날개≫에는 5·16 전후의 시대적 고뇌를 담았다. 그 뒤에 이어지는 ≪고산 식물≫, ≪사도행전≫, ≪수석열전≫ 등은 자신이 속한 시대 속에서 영원을 향해 전진하는 시인의 고독을 다루었고, 영원하고 보편적인 본질을 탐구했다.



엮은이

이연의는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건산리에서 태어났다. 경희대학교 국어국문과에서 <신동엽 시 연구: 전통성을 중심으로>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박사 과정을 수료한 후 기독교 문학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고 개화기 시가부터 윤동주, 박두진, 박목월, 김현승, 구상, 김남조, 박이도 등 기독교 시인들의 작품을 공부해 왔다. 지금은 경희대학교 취업진로지원처에서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차례


墓地頌
해의 품으로
香峴
靑山道
雪岳賦

道峯
하늘
흰 薔薇와 百合꽃을 흔들며
푸른 하늘 아래
어서 너는 오너라
薔薇의 노래
바다 1

午禱


돌의 노래
山脈을 간다
바다의 靈歌
거미와 星座
꽃과 港口
봄에의 檄
江 2
갈보리의 노래 2
詩人共和國
우리들의 기빨을 내린 것이 아니다
비로소 당신 앞에
八月의 江
孤獨의 江
人間 密林
당신의 사랑 앞에
별이 별더러
高山植物
靑瓷象嵌雲鶴文梅甁 緣起
별밭에 누워
예레미야의 노래
不死鳥의 노래
빛의 늪

啓示의 꿈
銀河系, 太陽系, 大宇宙天體 無限圖
立體의 늪
野生代
나 여기에 있나이다 주여
갈대
너의 隆起
가을 絶壁
어떤 노을
平原石 異變
가시 면류관
강강수월래
聖 孤獨
대숲
당신의 城
귀뚜라미의 노래
決鬪
新約
詩集
편지
水石 會議錄
書翰體
새에게
일어서는 바다
氷河期
氷壁을 깬다
낙엽, 또는 너무나 머나먼 당신의 가을 길
새와 별
天池
별의 노래 꽃노래
갈보리 獨唱
불덩어리 꿈
天台山 上臺
젊음의 바다
完璧한 山莊
토르소
默示錄
自畵像
天體圖
金剛全圖
꽃들의 행렬
使徒行傳 13
使徒行傳 17
使徒行傳 19
속의 해
불의 씨
아무도 내 노래를
꽃과 별
팔월
시의 나라 시
겨울 나라 시
별, 장미, 꿈
햇덩어리 가슴에 품고 징 치며 가자
수석영가 Ⅳ
수석영가 Ⅺ
당신의 사랑 앞에
영혼의 내 낡은 장막
한나절 오월 햇살
절대 사랑 당신의 품에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연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해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맑앟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뙨 얼굴 고은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딿아, 사슴을 딿아,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딿아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딿아 칡범을 딿아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애뙤고 고은 날을 누려 보리라.



●꽃과 港口

나무는 철을 따라
가지마다 난만히 꽃을 피워 흩날리고,

인간은 영혼의 뿌리 깊이
눌리면 타오르는 자유의 불꽃을 간직한다.

꽃은 그 뿌리에 근원하여
한 철 바람에 향기로이 나부끼고,

자유는 피와 생명에 뿌리 하여
영혼의 밑바닥 꺼지지 않는 근원에서 죽지 않고 탄다.

꽃잎. 꽃잎. 봄 되어 하늘에 구름처럼 일더니,
그 바다—, 꽃그늘에 항구는 졸고 있더니,

자유여! 학살되어 바다 속에 버림받은 자유여!
피 안개에 그므는 아름다운 항구여!

그 소녀와 소년들과 젊음 속에 맥 뛰는
불의와 강압과 총칼 앞에 맞서는

살아서 누리려는 자유에의 비원이
죽음—. 생명을 짓누르는 공포보다 강하고나.

피는 꽃보다 값지고,
자유에의 불꽃은 죽음보다 강하고나.

●水石 會議錄

돌밭의

돌들이 날더러 비겁하다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어리석다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실망했다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눈물 흘리라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피 흘리라고 한다.

돌들이 일제히 주먹질한다.
돌들이 일제히 욕설 퍼붓는다.
돌들이 나를 향해 돌을 던진다.

돌들이 다시 또

돌들이 날더러 일어설 것이냐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도망할 것이냐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숨어 버릴 것이냐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분노하라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불 질러 보라고 한다. 어둠에.

돌들이 날더러 또 사자가 되라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독수리가 되라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말승냥이가 되라고 한다. 차라리.
돌들이 날더러 표범이 되라고 한다. 차라리.
돌들이 날더러 학이나 비둘기
사슴이나 산양이 되라고 한다. 차라리.

아, 돌들이 이번에는

돌들이 날더러 하늘의 별들을 따 와 보라고 한다.
햇덩어리 이글대는
이글대는 햇덩어릴 쏘아 떨어뜨려 보라고 한다.
저 달의 달그림자
눈물의 얼음벌을 쏘아 떨어뜨려 보라고 한다.

돌들이 또 날더러
바다 위로 쩔벙쩔벙 걸음 걸어와 보라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돌로써 빵을 빚고
손으로 돌을 쳐 콸콸 솟는 샘물
모세처럼 돌에서 샘물을 솟게 해 보라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이런 소리 끝까지 듣고 있는 바보
돌들이 날더러 바보가 아니냐고

돌들이 날더러 돌이나 되라고 돌이나 되라고 한다.

그렇게 내가 손들고 일어서서
진실로 한 점
돌이 될 것을 선언하자,

이때 천천만 돌들의
그 돌 속의 불, 돌 속의 물, 돌 속의 빛, 돌 속의 얼음, 돌 속의 시, 돌 속의 꿈, 돌 속의 고독, 돌 속의 눈물, 돌 속의 참음, 돌 속의 힘, 돌 속의 저항,

돌 속의 의지, 돌 속의 평화, 돌 속의 사랑,
돌 속의 자유,
돌 속의 우주, 돌 속의 환희
있는 것 일체 모두
하나로 엉겨,

하늘 천지 땅 천지 둥둥 뜨는 함성
만세 만세 돌들의 외침 끝이 없었다.

●절대 사랑 당신의 품에

하늘 높고 푸르고
햇살 윙윙
눈부신,

이런 날의 넋의 나의
알 수 없는
두려움,

홀로 빙빙
광야처럼
종말처럼 헤매는,

보소서
살피소서
받아 주소서

방황하는 죄인 하나
어쩔 줄을
모르는,
절대 사랑
당신의 품에
안아 주소서.



서지정보

발행일 2013년 11월 20일
쪽수 330 쪽
판형 128*188mm ,  210*297mm
ISBN(종이책) 9788966803941   03810   16000원
ISBN(큰글씨책) 9791130452470   03810   32000원
분류 시, 지만지, 한국문학
초판본한국시문학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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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컴북스닷컴
http://commbooks.com/%EB%8F%84%EC%84%9C/%EB%B0%95%EB%91%90%EC%A7%84-%EC%8B%9C%EC%84%A0-%EC%B4%88%ED%8C%90%EB%B3%B8/

Posted by 시요정_니케
,
 
출처: 사)서은문병란문학연구소
https://cafe.daum.net/m-b-l/h7Kp/177?svc=cafeapi


서은 선생님의 앙가지망(engagement) 시 감상


 


Ⅰ. 들어가기


  내가 고교에 입학하고 문병란 선생님을 만났을 때는 젊은 30대 초반의 선생님이셨고 강의하시는 모든 내용이 시어가 되어 학생들로부터 요즘언어로 인기 짱 이셨던 선생님이셨다. 당시 나는 1학년으로 선생님의 수업을 직접 들을 수 없었고 3학년 선배와 같이 하숙을 했기 때문에 그 선배가 틈만 나면 선생님의 강의 내용을 내에게 말해 주었던 기억으로 선생님의 존함을 익히고 있었다. 다음 학년도에는 광주로 전근을 가셔서 뵐 수 있는 기회가 없다가 내가 문단에 등단을 하고 첫 시집을 발간하면서 선생님의 발문을 받으면서 선생님과 연을 맺고 문학 활동을 하는데 많은 도움과 지도를 받아 왔다. 선생님의 처음 시작 활동은 순수 서정시로 출발하였으나 군부 정치와 유신정치의 비판에 앞장선 앙가지망의 참여문학에 참여하면서 교단에서 물러나 백수 시인의 길을 걷게 되었고 학원 강사로도 취업이 어려워 그야말로 젊은 시절 고난의 길을 걸어오신 우리 문단의 진정한 시인 이셨다. 민주화가 되면서 대학교수로 자리를 잡았지만 정년이라는 나이 때문에 그나마도 교수 생활이 길지 않았지만 선생님의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과 문학적 이론과 시론은 문학을 꿈꾸는 문학도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다보니 교수에서 퇴직한 후에도 선생님의 문하생은 끊이질 않았다. 필자인 나도 선생님의 문하생으로 지도를 받은 사람들 중의 하나다.


 


  우리가 흔히 시론을 접하거나 참여시 감상을 할 때 앙가지망(engagement)이라는 용어를 접한다. 나의 은사님이신 서은 문병란 선생님의 시 모두가 앙가지망의 시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의 시작 활동은 순수 서정시로 출발 하셨지만 선생님의 문단 생활은 앙가지망의 삶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먼저 선생님의 생애를 살펴보고 앙가지망의 참 뜻과 함께 지난 한글날 선생님의 시 한편을 감상문으로 하여 인터넷에 올렸던 내용을 이번의 지면에 실어볼까 한다.


 


Ⅱ. 서은 선생님의 생애와 앙가지망(engagement)  


  서은 문병란(文炳蘭 : 1935~2015)선생님은 전남 화순군 도곡면 원화리에서  출생하셨다. 1960년 조선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셨고, 1963년 『현대문학』에 「가로수」,「밤의 호흡」,「꽃밭」등이 김현승 시인의 추천을 받아 등단하셨고, 순천고, 광주일고, 조선대에서 교직을 역임하셨다. 시집으로는 『문병란 시집』(1971), 『정당성』(1973), 『죽순밭에서』(1977), 『땅의 연가』(1981), 『무등산』(1986) 등이 있고 1990년대 이후의 시집으로는 제1회 박인환 문학상 수상 시집 『내게 길을 묻는 사랑이여』(2010)를 비롯하여 『매화연풍』 등 32여집이 있고, 산문집으로 『저 미치게 푸른 하늘』(1979)등 13집이 있다.


  


 선생님께서는 1973년 시집 『정당성』을 내놓은 이후 시적 노선이 더욱 분명해졌다. 당시의 유신 독재 정권과 가진 자들의 횡포에 정면으로 맞서는 일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의 사명이며 존재 이유로 생각한 것이다. 선생님은 양심적인 시인으로서 홀연히 저항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선생님의 시정신은 1974년 『창작과 비평』겨울호에 「겨울 산촌」,「고무신」,「살인자」등의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반체제 저항 시인으로서 알려지게 된다.


 


 선생님은 민중 지향이라는 뚜렷한 시적 목표와 방향을 가졌기 때문에 선생님의 시어는 민중의 언어일 수밖에 없다. 시인 이시영의 말대로 서은 문병란 시인의 시어는 "별다른 지식 없이도 한번 읽으면 이내 그 뜻을 알 수 있는 평범하고 친숙한 언어"이고, 그것은 "민중의 생생한 생활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건강한 언어다. 이러한 '쉬운 시 쓰기'는 민중 속으로 들어가는 문학의 기법이며, 지식인을 위한 모더니즘 시를 극복하는 선생님의 문학적 방법이었다.


 


 이와 맥락을 같이하는 선생님의 민중시는 1970년대에 내놓은 시집 『죽순밭에서』(1977), 시문집『호롱불의 역사』(1978), 농민시집『벼들의 속삭임』(1980)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중『죽순밭에서』는 1979년에 도서출판 한마당에서 중간되었는데, 정부는 이 시집이 "외설스럽고 민족정신을 부정했으며 일본 국기를 모독했다."는 이유를 내세워 판매 금지 조치를 내린다. 서은 문병란 선생님은 이에 대해 25쪽에 걸쳐 그 부당함을 조목조목 따지면서 판금 조치를 철회하라는 항의서를 당국에 제출했다. 이 사건은 사회에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그 때가 유신정권 말기였다. 그 때의 항의서를 입수 할 수 없어 여기에 소개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앙가지망은 실존주의 철학에 그 근간을 두고 있다.


인간이라고 하는 실존은 완벽한 모습이 되기 위해 모순과 투쟁하며 자신의 창조적 자유를 위해 부조리와 투쟁하는 존재라는 철학적 사고에 따라 이  철학적 사고에 기초하여 발생한 용어다.


 


이를 구체적으로 그 개념과 의미를 살펴보면


앙가주망(engagement)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사르트르를 비롯한 실존주의자들에 의해 쓰기 시작한 용어로서, 사회참여(社會參與), 자기구속(自己拘束)이란 뜻이다.


 


 실존주의에서는 인간은 사회적 현실에 구속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그 현실을 변화시켜 나가는 존재라고 보며, 이러한 인간과 현실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써 이 용어를 사용했다.


 


 문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예술지상주의의 문학에 치중하는 것이 일반적 통례이지만 이 예술 지향이 사회적, 정치적 부조리까지도 터치하여 문학적 입장을 명확히 내세워 저항문학 참여문학의 형태를 가지고 모순과 부조리를 제거해 나가자고 하는 형태의 문학을 말한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작가는 상황을 폭로함으로써 세계의 변혁을 시도하고, 독자는 폭로된 대상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하므로, 작가와 독자 모두가 필연적으로 사회적 입장을 취하게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정치적 문제에 적극적 반응을 보이고 문제의 핵심을 작품으로 형상화하였다. 정치나 사회문제에 자진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을 앙가주망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러한 철학에 근간을 두고 참여한 시들이 과거 어두웠던 우리 사회에서는  많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선생님의 시는 참여시 이면서도 친숙한 언어의 서정성까지 담고 있어서 각계각층의 독자층을 가지고 이었을 뿐만 아니라 시낭송이라는 문학의 새로운 장르가 태동 되면서 선생님의 많은 시가 애송되고, 전국의 각종 시낭송 대회가 있을 때 마다 낭송작품으로 출품된 작품을 보면 「땅의 연가」 「직녀에게」 「인연서설」등이다. 앙가지망 시로서 낭송되는 이 작품들은 우리에게 너무나 낯이 익어 굳이 감상을 쓰지 않아도 되리라 보아 이 작품들의 감상은 생략하고 지난 한글날을 맞아 필자가 운용하는 네이버 문학밴드 『시와 이야기』에 「식민지의 국어 시간」 이라는 시 한편을 감상문으로 하여 올렸던 내용과 나의 첫 시집 『12월32일의 노래』에 축시로 써주신 「나눗셈과 뺄셈」을 이번의 지면에 실어볼까 한다.


Ⅲ. 시 감상


 


식민지의 국어시간 / 문병란


 


내가 아홉 살이었을 때


20리를 걸어서 다니던 소학교


나는 국어 시간에


우리말 아닌 일본말,


우리 조상이 아닌 천황을 배웠다.


 


신사 참배를 가던 날


신작로 위엔 무슨 바람이 불었던가


일본말을 배워야 출세한다고


일본놈에게 붙어야 잘 산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조상도 조국도 몰랐던 우리,


말도 글도 성(姓)까지도 죄다 빼앗겼던 우리,


히노마루 앞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말 앞에서


조센징의 새끼는 항상 기타나이(더러운 놈)가 되었다.


 


어쩌다 조선말을 쓴 날


호되게 뺨을 맞은


나는 더러운 조센징,


뺨을 때린 하야시 센세이는


왜 나더러 일본놈이 되라고 했을까


 


다시 찾은 국어 시간,


그 날의 억울한 눈물은 마르지 않았는데


다시 나는 영어를 배웠다.


혀가 꼬부라지고 헛김이 새는 나의 발음


영어를 배워야 출세한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스물다섯 살이 되었을 때


나는 국어 선생이 되었다.


세계에서 제일간다는 한글


배우기 쉽고 쓰기 쉽다는 좋은 글,


나는 배고픈 언문 선생이 되었다.


 


지금은 햐야시 센세이도 없고


뺨 맞은 조센징 새끼의 눈물도 없는데


윤동주를 외우며 이육사를 외우며


나는 또 무엇을 슬퍼해야 하는가


 


어릴 적 알아들을 수 없었던 일본말,


그 날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는데


다시 내 곁에 앉아 있는 일본어 선생,


내 곁에 뽐내고 앉아 있는 영어 선생,


어찌하여 나는 좀 부끄러워야 하는가


 


누군가 영어를 배워야 출세한다고


내 귀에 가만히 속삭이는데


까아만 칠판에 써놓은


윤동주의 서시,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글자마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오! 슬픈 국어 시간이여!


 


[감상]


 어떤 학자는 말했다. “시인은 과거를 점치고 미래를 예언한다고”


이 시 「식민지의 국어 시간」 이 바로 과거를 점치고 미래를 예언한 시라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과거를 점치고 현재를 주시하면서 미래를 예언 할 수 있는 시가 바로 앙가지망의 시다. 선생님께서 이 시를 쓰고 발표할 당시만 해도 오늘의 사회 현실과는 거리가 먼 시대였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을 들여다보자. 거리에 즐비한 상가 명은 물론이고 아파트의 이름을 보자. 우리의 의식 속에는 겨레의 말과 글보다 외국어를 더 중시하고 국적불명의 외국어를 사용해야 한 차원 더 높은 신분 상승이 되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다. 오죽했으면 시중에 우수개 소리가 떠돌고 있겠는가? 시골 사는 나이 드신 시부모가 도시 아들네 집 못 찾아오게 꼬부랑말로 아파트 이름을 짓는다는 이 풍자의 말을 우리는 무심코 넘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시를 감상하면서 사유되는 상상의 확장을 오늘의 현실과 비유하여 기술해 본 시감상이다. 이 시 본연의 시 감상을 위해 이 시에 대하여 선생님께서 저희들에게 들려 주셨던 시작 노트를 이곳에 요약해서 올려본다.


 


 몰라도 상관은 없지만 ‘히노마루’는 일장기, '센세이'는 선생님을 가리키는 말이고 ‘기타나이’는 더러운 놈이라는 뜻의 일본어이다. 일본에 의해 빼앗긴 우리말과 글을 되찾아 채 가꾸고 다듬기도 전에 다시 일본어를 익히고 영어를 배워야 했던 현실이 시인(선생님)은 부끄럽고 서글프다. 출세하려면 국어보다 외국어를 더 알아야하는 당시의 풍토가 시인으로서는 못마땅하다.


 


 우리말 가꾸기에 대해 말하면 오히려 세계의 변화를 쫒아가지 못해 뒤떨어진 사람의 넋두리로 받아들인다. 한글날이 1991년 국가공휴일에서 제외된 이후 28여년이 흘렀다. 이런저런 행사야 열릴 터이지만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겨레의 바탕인 우리말의 힘을 깨닫지 못하고 아직도 외국어를 더 중시하는 생각의 똬리가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밥집’이라 하면 허룸한 싸구려 식당처럼 보이고 ‘레스토랑’이라 해야 왠지 근사해 뵈면서 그곳에서 ‘칼질’을 한 사람은 올려다봐줘야 마땅할 것만 같다. 가게나 아파트 심지어 공공시설의 이름도 외국어로 지어야 품격이 있고 멋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외제가 무조건 좋은 시절도 아닌데 말과 글의 우리 것은 여전히 홀대받는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구호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님을 요즘 곳곳에서 증거 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제 더는 슬픈 국어시간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


 


Ⅳ. 나가는 말


 선생님은 고등학교 은사이시고 내가 문학의 길로 들어 와서는 선생님한테서 문학 지도를 받아왔던 제자로서 시건방지게 훌륭하신 선생님의 시를 가지고 말도 되지 않은 시감상이라는 미명아래 횡설수설 식 감상문을 기술 했다. 선생님께서 근모 이놈 하고 천상에서 꾸짖을 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아생전 선생님을 뵙고 문학 지도를 받을 당시 선생님께서 당신의 시로 시인의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하여 훈화하시면서 그 시의 시작 배경 또는 그 시가 갖고 있는 메타포와 메시지 등을 말씀 하실 때 나는 그 말씀을 노트도 하고 가급적 선생님의 시 정신을 배우고자 보관해 왔던 노트내용을 뒤적여 선생님의 시 감상을 올리는 무례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않고는 나의 필욕을 잠재울 수 없어 ‘서은 문학지 통권 제4호’의 원고로 선생님의 시 감상을 올리게 되었다.


 


 선생님께 문학 지도를 받았던 당시의 선생님께 받쳤던 나의 졸시 헌시와, 나의 첫 시집 ‘12월32일의 노래’ 발간 때 축시로 써 주신 시를 소개 하면서 본 소고를 마칠까 한다.


 


밑줄 / 이 근모


 


선생님 말씀 말씀에 밑줄을 긋습니다.


밑줄마다 시를 쓰는 길이 열립니다.


나는 그 길을 헤매는 나그네입니다.


어떨 때는 아스팔트길을 걷고


또 어떨 때는 신작로 자갈길을 걷는


나그네입니다.


가끔 가끔


신작로 자갈먼지 호통을 칩니다.


소중한 선생님 말씀 다 어딜 가고


밑줄만 달랑 남아 파르르, 파르르


가늘게 떱니다.


그럴 때 마다 나는


아주 중요한 생각의 선으로 살아나도록


그 밑줄에 덧칠합니다.


드디어 밑줄이 춤을 춥니다.


밑줄에 고추잠자리 내려앉아


벌겋게, 벌겋게 열정을 태웁니다.


귀뚜라미 밤샌 노래


이슬로 앉아있습니다.


목쉰 접동새 새벽녘을 알리고 나서야


밑줄 위에 나를 올려놓습니다.


파르르 떨던 밑줄 침잠된 고요로 새근새근


잠이 듭니다.


밑줄,


살아가는 이치가 그 안에 있었습니다.


 


(시작노트)


 이 시는 벌써 20여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당시 선생님을 찾아뵙고 여러 가지 가르침의 이야기를 듣고 난후 선생님께 바쳤던 나의 헌시다.


 


나눗셈과 뺄셈 / 문병란


-이근모 시집 ‘12월32일의 노래’ 출판에 부쳐-


 


내가 네 몫을 훔칠 때


굶주림은 날 빤히 쳐다본다.


이 을씨년스런 세계의 아침


국제 구제금융협회 총재


샤일록크씨는 맹물로 끼니를 때운다.


 


이 결핍의 시대, 네 몫을 훔치는


저 도적의 손들 그들의 십자가 아래서


그 빼앗긴 내 몫의 절반을 떼어주며


내 살은 떡이요, 내 피는 포도주라 속삭인다.


 


내가 반 조각의 빵을 나누면


눈물은 목마름 적시는 포도주


예수는 두 번 죽어 하늘을 보라하고


도적은 유유히 처형장을 빠져나간다.


 


보라, 훔치는 자 잔치 벌이는 날


흥부 바가지에 떨어지는 동전 소리


놀부 통장에 아라비아 숫자 재주를 넘고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오늘도 나는 망했네 양심의 자살.


 


그대는 계속 성공하고 나는 자꾸 실패하고


그리워요 배고파요 배 아파요


그 사이 공자는 인생관을 수정하고


떠나가는 맑스의 어깨위에


떡가루 같은 흰눈이 펑펑 내린다.


 


아, 인생은 나눗셈인가 뺄셈인가.


 


(감상)


 이 시 ‘나눗셈과 뺄셈’은 나의 첫 시집 출판 당시 IMF로 인하여 우리 경제가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고 나의 시집의 표제가 되었던 ‘12월32일’은 일용 근로자의 애환을 노래한 시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나의 시인의 길을 가도록 방향 제시를 해 주는 암시적 축시였다.


 이전투구 식 사회상과 남의 공을 자신의 공으로 가로채고 그러면서 한 점 부끄럼 없이 에헴하고 으스대는 ‘나눗셈과 뺄셈’의 메시지를 담은 이러한 선생님의 가르침을 나는 제대로 실행 하지 못한 어중이떠중이 시인으로 오늘도 방황 하고 있다.


 


 졸필로 작성한 나의 글을 읽어 주신 여러분께 감사와 아울러 천상에서의 선생님께 이 소고를 바친다.


 


선생님 영원하소서. 존경합니다.


 


2018. 11. 5.


제자 시인 이근모 근서


 


  
출처: 사)서은문병란문학연구소
https://cafe.daum.net/m-b-l/h7Kp/177?svc=cafeapi
Posted by 시요정_니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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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 박인환

노인은 육지에서 살았다.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시들은 풀잎에 앉아
손금도 보았다.
차(茶) 한잔을 마시고
정사(情死)한 여자의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을 때
비둘기는 지붕 위에서 훨훨 날았다.
노인은 한숨도 쉬지 않고
더욱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성서를 외우고 불을 끈다.
그는 행복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고요히 잠드는 것이다.

노인은 꿈을 꾼다.
여러 친구와 술을 나누고
그들이 죽음의 길을 바라보던 전날을.
노인은 입술에 미소를 띄우고
쓰디쓴 감정을 억제할 수가 있다.
그는 지금의 어떠한 순간도
증오할 수가 없었다.
노인은 죽음을 원하기 전에
옛날이 더욱 영원한 것처럼 생각되며
자기와 가까이 있는 것이
멀어져가는 것을
분간할 수가 있었다.

ㅡ박인환 시인의 장남, 박세형 시인님이 좋아하는 시ㅡ

마지막 시
죽은 아포롱
이상 시인의 추모 시

Posted by 시요정_니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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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지막엔 시만이 시인을 만든다 / 정일근




신문사는 새로 입사하는 수습기자에게 기사 작성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종이밥을 먹던 신문기자 시절, 어느 누구도 나에게 기사 쓰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나이 들어 입사한 신문사라 후배를 선배로 모시고 경찰기자 생활이 시작됐다.1진은 서울 중부경찰서 기자실 소파에 앉아있고, 나는 남대문, 용산경찰서를 들개처럼 싸돌아다녔다.

내가 근무하는 신문사가 석간신문을 제작하고 있어 새벽같이 종합병원 영안실과 경찰서 형사계, 유치장을 돌고 1진에게 간밤의 사건과 사고를 전화로 보고한다. 그러면 1진은 뉴스가 될만한 것을 기사로 만들어 즉시 전화로 부르라고 한다.

교과서에서 배운 6하원칙을 적용하여 기사를 작성해 전화송고를 하면 욕설이 쏟아진다. 새벽부터 나이 어린 신문사 선배에게 듣는 욕은 사람을 참담하게 만들어준다. 남쪽에 두고 온 가족생각이 나고, 같이 욕설을 퍼붓고 때려치워 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1진의 지적은 정확했다. 내가 놓친 부분을 보지도 않고서 정확하게 찾아냈다.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다.

1진은 그렇게 욕설로 지적을 할 뿐 3개월의 그 지독한 수습기간에 신문기사를 어떻게 쓰라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문화부 기자 생활을 할 때의 일이다. 강원도 백담사에 유배돼 있던 전두환 전대통령이 법회를 연다고 해서 취재지원을 나간 적이 있었다. 경쟁사의 기자들과 함께 취재를 하고 나는 끙끙대며 2백자 원고지 5장 정도 분량의 스케치 기사를 작성해 팩스로 보냈다.

그런데 경쟁사 모 선배기자는 기사를 작성하지도 않고 메모만 보고, 그것도 전화기를 들고 짧은 시간에 25장 분량의 기사를 송고하는 것을 보고 나는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과연 나는 신문기자의 자질이 있는 가하는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다행히 내 그런 좌절을 안 한 선배가 ‘신문기자의 교과서는 신문이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 때서야 나는 신문을 통해 신문기사 쓰는 법을 새롭게 배우기 시작했다. 매일 매일 쏟아지는 신문을 펴놓고 좋은 기사는 옮겨 적어보고, 사건과 사고의 유형별로 좋은 기사들을 스크랩해 참고서를 만들었다. 신문 속에 내가 가고 싶었던 길이 숨어있었다.

시를 쓰는 일도 마찬가지다. 시 창작의 최고의 교과서는 시고, 시집이다. 그것도 좋은 시고 시집이어야 한다.

앞서 잠깐 언급한 적이 있지만, 나는 시인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좋은 시집을 권하고 무조건 필사할 것을 숙제로 내준다. 눈으로 읽는 리듬과 손으로 쓰며 배우는 리듬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나도 신춘문예 당선 전까지 참으로 많은 선배시인들의 시를 옮겨 쓰며 시 쓰는 법을 배웠다. 시인이 되려는 제일 마지막 관문은 선배들의 좋은 시와 시집이 나에게 시가 무엇이며, 시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내 친구 최영철 시인은 내 시집 발문에 나를 ‘타고난 시인’이라고 쓴 적이 있다. 너무 일찍 배운 슬픔으로 감성은 타고 났을지 몰라도 나 역시 ‘만들어진 시인’임을 고백한다. 손에 펜혹이 생기도록 좋은 시를 옮겨 적는 연습을 통해 시를 배웠다.

시인이 되는 교과서는 시인들의 시에 있고, 시집에 모여 있다. 시인은 시험을 통해 자격증을 받는 것이 아니다. 선배 시인들의 인정을 통해 시인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멀리서 혹은 엉뚱한 곳에서 시인의 길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이다.

나는 앞에서 많은 것들이 시인을 만들어 준다고 했다. 그런 것들 중 제일 마지막에 나를 시인으로 만들어 준 것은 시다. 시인이 된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후배라 할지라도 좋은 시를 발표하면 한 번 옮겨 적어보며 그 시의 비밀을 찾으려고 한다.

시인을 꿈꾸거나, 시인인 그대여. 시를 읽자. 시집을 읽자. 그것이 시인을 만들고, 시인의 깊이를 더욱 깊게 만들어준다.

유행가도 시인을 만든다

내가 제일 처음 배운 유행가는 배호의 노래였다. 제목은 ‘누가 울어’. 그 때 나는 아버지가 없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어느 비오는 오후, 어머니가 흥얼거리는 그 슬픈 노래가 어린 나를 울렸다. 어머니 몰래 연습장에 노래가사를 적었다. 지금도 생생한 그 노래 1절은 다음과 같다.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같은 이슬비 누가 울어 이 한밤 잊었던 추억인가 멀리 가버린 내 사랑은 돌아올 길 없는데 피가 맺히게 그 누가 울어 울어 검은 눈을 적시나.’

그날 밤 나는 이불 속에서 어머니의 노래를 조용조용 불러보았다. 그리고 정말 ‘피가 맺히게’ 울었다. 어렸지만 노래에 담긴 홀어머니의 마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어린 시절 배호의 노래가 슬픔이 어떤 가락이며 어떤 색깔인지를 가르친 것이다.

어머니의 술집에는 유행가가 끊이지 않았다. 내 유행가 교실은 그 술자리였다. 막걸리 술 주전자를 나르며 나는 손님들의 유행가를 배웠다.

가게에서 일하던 형들의 유행가 책을 훔쳐 가사를 외웠고 장난감 아코디언으로 서툴게 멜로디를 쳐보기도 했다. 영화관에서 ‘미워도 다시 한 번’ ‘가슴 아프게’ 같은 영화를 보며 주제가를 배웠고, 쇼 공연에서 늘 제일 마지막에 출연하는 이미자의 노래를 함께 불렀다.

나는 세상의 슬픈 유행가가 내 마음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유행가 가사 같은 시를 쓰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이미자의 “기러기 아빠”를 흉내낸 시를 적어 담임 선생님을 걱정시켜 드리기도 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남겨주신 것은 가난뿐이었지만 나는 뜻밖에도 아버지가 남기신 글을 읽었다.

아버지는 달필이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것 같은 고급노트에 아버지는 당신이 좋아하셨던 유행가 가사를 볼펜 글씨로 빽빽이 적어 놓으셨다. 나는 유품과 같은 아버지의 유행가 가사를 오랫동안 가슴에 담고 지우지 않았다.

30대에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도 노래를 좋아하셨다. 아버지가 좋아하신 노래는 가곡이나 명곡이 아니라 유행가였다. 아버지는 시골 할아버지 댁에서 축음기를 통해 노래를 듣기도 했고, 진공관 전축을 사서 노래를 자주 들으셨다. 무엇보다도 아버지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몇 십분 전에도 잠시 들른 아버지 친척 댁에서 전축을 틀어 놓고 누군가의 유행가를 열심히 들으셨다고 했다.

어머니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버지의 유행가는 ‘갈대의 순정’뿐이다. ‘사나이 우는 마음을 그 누가 아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순정…’은 아버지의 지독한 애창곡이었다고 한다. 그런 유행가 만들어주는 60년대식 슬픔이 나에게 서정시를 쓰게 만들었고, 유행가는 내 서정의 자양분이 되었다.

나는 어느 자리에서 배호의 노래를 부를 줄 아는 시인과 부르지 못하는 시인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유행가를 딴따라라 한다. 나는 그 딴따라가 좋다. 흔히 대중적, 통속적이라는 감상이 시인에게는 따뜻한 자양분이 된다.

한국 시단에는 3배호가 있다. 대구의 서지월 시인이 서배호, 부산의 최영철 시인이 최배호, 울산의 나는 정배호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서배호는 배호와 똑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하고, 최배호는 배호와 똑같은 모습으로 노래를 한다. 나는 그들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현재 우리 시단의 좋은 시인인 그들의 시가 유행가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음치고 박치인 나는 폼만 배호다. 서배호, 최배호의 노래 뒤에는 앙코르가 있지만 내 노래는 앙코르가 없다. 그래도 나는 열심히 유행가를 부르고 듣는다. 유행가에서 시를 배웠기 때문이다.

길이 시인을 만든다

중학교 2학년 때 부산에서 진해까지 걸어온 적이 있다. 악동 친구들과 해운대 해수욕장에 놀러갔다가 집으로 돌아올 차비마저 다 유흥비(?)로 날려버렸기 때문이었다. 여름이었고, 우기였다.

우리는 해운대해수욕장에서 엄궁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엄궁에서 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너 명지로 가, 명지에서 다시 걸어 진해까지 갈 계획이었다.

친구 3명의 무사귀환을 책임져야 하는 내 주머니에는 1백20원이 숨어 있었다. 나는 그 돈으로 진해 인근인 웅천에서 버스를 탈 계획이었다. 다들 부모님에게 선생님과 함께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떠난 여행이었기에 우리는 어디에도 구원을 요청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걸어가자.

무슨 중대한 결정이라도 내리듯 친구들에게 그렇게 선언하자 눈물이 핑 돌았다. 염소란 별명을 가진 친구도 찔끔거렸다. 그 때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붉은 완행버스를 타고 떠나왔던 길. 그 먼길을 과연 걸어갈 수 있을까, 두려운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다른 길은 없었다.

믿는 것은 우리가 가진 A자형 군용 텐트, 알코올 버너, 라면 몇 봉지, 쌀 등과 열 다섯 살의 두 다리 뿐 이었다. 그래, 한 이틀 걸어가면 진해까지 갈 수 있을 거야. 가다가 어두워지면 길 위에서 자고 가지. 내가 앞장섰다. 결국 우리는 1박2일을 걸어서 진해로 돌아왔다. 내가 걸어본 최초의 장도였다. 그날 이후 나는 세상의 길에 대해 자신을 가졌다. 그리고 그 길을 걷고 난 후 내가 많이 성숙해졌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진해에서 자전거를 타고 진주까지 갔다왔다. 그 높은 마진고개를 넘고, 더 높은 진동고개를 넘어 진주로 갔다. 친구의 친척집 작은 골방에서 새우잠을 자고, 내리는 비를 피해 다리 밑에서 밥을 먹었다. 역시 집으로 돌아오니 나는 성숙해져 있었다.

진해에서 마산까지 버스통학을 하던 고등학교 3년. 하교 길 자주 마진터널 검문소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왔다. 어둠의 산길,홀로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집으로 돌아오면 내 몸으로 스며든 길의 향기가 좋았다.

그 시절 우연히 목월 선생이 쓴 젊은 날의 비망록에서, 청년 박목월이 군용 모포 한 장만 들고 강원도에서 부산까지 걸어왔다는 글을 읽었다. 낮에는 해변에서 자고 밤에는 걸어서 동해의 길을 밟았다는 글을 읽고 전율했다. 나는 책을 읽다 일어서서 외쳤다. 떠나자. 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 길을 따라 떠나자.

그대, 길은 사람에게 사유의 시간을 가져다준다. 길을 걷는 사람은 누구나 혼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럿이, 함께 가는 길이라도 해도 어느 누구도 자신의 길을 걸어주지 않는다. 결국 길은 혼자 가는 길뿐이다. 혼자 가는 길이 사람을 성숙시켜 주고, 시를 깊어지게 만들어 준다.

길은 무엇보다도 그리움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준다. 가보지 않은 저쪽에 대한 그리움이 길을 만들었으니, 그리움이 없다면 길도 없었다. 길 위에서 혼자임을 아는 사람은 언제나 그리움의 따뜻함을 꿈꾼다. 그 따뜻함을 나는 서정이라 말하고 싶다. 홀로 길을 걸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길 위에서 그리움을 꿈꾸지 않은 사람은 서정시인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길의 가장 큰 가르침은 고통이다. 그대, 길 위에서 혼자 맞는 저물 무렵과 일몰의 고통을 아는가. 타관을 지날 때 하나 둘씩 돋아나는 집들의 불빛들을 바라보며 떠나온 곳으로 등이 굽는 쓸쓸함.

아무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저녁이 찾아올 때 비로소 그리운 사람과 이름들. 저무는 길 위에서 고통을 느껴보지 않고서 사랑의 시를 쓸 수 없다. 등 배기는 길 위에서 고통의 칼날에 싹둑싹둑 잘리는 마디잠을 자보지 않은 사람 또한 시인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니, 그대 오늘 그 길 위에 서라.

바람도 시인을 만든다

왜 그렇게 바람이 좋았는지 몰라.

열네 살 중학생이 걸어서 학교 가는 길이다. 보리밭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간다. 보리가 누렇게 익어 가는 오월이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소년의 이마를 짚는다. 바람의 손은 언제나 서늘하다. 소년은 멈추어 선다.

그 때 소년은 보았다, 바람의 몸을. 무형인줄로만 알았던 바람이 보리밭 위로 달아나며 드러내는 몸의 흔적을. “저게 바람의 몸이구나”라는 깨달음. 그것은 세상의 비밀 하나에 눈 뜬 기쁨이었다. 그러한 세상의 비밀을 찾는 것이 시고,그 일은 내가 해야하는 일이다고 생각했다.

열네 살 중학생이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시 오 리쯤 되는 길이다. 보리가 누렇게 익어 가는 오월이다. 다시 바람이 분다. 함께 돌아가는 친구들은 보지 못하는 바람의 몸을 나 혼자 지켜보며 소년은 바람이 되고 싶었다. 온 몸으로 부는 바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바람이 나에게 절망이었던 시간이 있었다.

열네 살 중학생은 열일곱 살 고등학생이 되어 백일장에 참석한다. 백일장의 시제가 ‘바람’이다. 열일곱 살은 자신에 차 있다. 일찍 바람의 몸을 보았기에. 이윽고 심사가 끝나고 입상자 명단이 방으로 붙는다. 열일곱 살은 실망한다. 자신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

장원자가 호명되어 단상으로 나간다. 뜻밖에도 기라성 같은 상급생들을 모두 제치고 동급생 여학생이 장원이다. 단발머리 그 여학생은 당당하게 서서 자신의 바람을 노래한다.

‘바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 첫줄에 나는 몸이 얼어붙는 충격을 받았다. 동급생 계집아이가 어떻게 저런 표현을 쓸 수 있는 것일까. 충격은 부끄러움으로 이어졌다. 부끄러움은 또 절망을 낳았다.

내가 바람의 몸을 보았을 때 바람의 존재를 생각하는, 같은 나이의 여학생의 정신세계와 언어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미워졌다.

백일장이 끝나고 열일곱 살은 호수 곁에 앉아 고민에 빠진다. 어떻게 하면 동급생 계집아이와 같은 시를 쓸 수 있을까.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열일곱 살은 자신에게 결여돼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는 표정이다.

열네 살과 열일곱 살에 만난 바람은 분명 다른 바람이었다. 나는 어제 불던 바람이 오늘 다시 분다고 생각하지 않게 됐다. 바람은 매일 매일 새롭게 태어난다. 새로 태어나는 바람에게는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 그것이 오늘의 시다. 그리고 나는 오늘 부는 바람이 내일도 불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분다. 그것이 내일의 시다.

처음 만난 시의 화두가 바람이었기 때문일까. 나는 일찍부터 풍병이 들었다. 한 곳에 머물지 못하는 바람 같은, 바람병이 들었다. 나는 내 사주팔자를 보지 않았지만 내 사주와 팔자에는 세찬 바람이 불고 있을 것이다. 바람이 불어 평생을 떠돌게 하는 역마살이 끼어 있을 것이다. 그런 바람들이 나를 시인으로 키웠다.

머무는 것은 바람이 아니다. 바람은 부는 것이다. 분다는 것은 움직임, 시는 그런 움직임이다. 시인은 바람이기 위해 늘 깨어있어야 한다. 고여있는 것들은 시인을 만들지 못한다. 바람이 불기에 살아야 한다고 노래한 시인도 있다.

나는 바람의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다. 오는 동안 많은 사랑도 있었고 눈물도 있었다. 나는 앞으로도 부는 바람의 길을 따라 바람처럼 불어갈 것이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시인의 운명이다.

언제나 나는 바람이고 싶다. 그대에게로만 부는 뜨거운 바람이고 싶은 것이다, 그대 나의 시여.

부끄러움이 시인을 만든다

습작시절 누구에게나 병이 생긴다. 이름하여 ‘신춘문예 병’. 그 시절을 보낸 사람들의 손에 아름다운 상처 ‘펜혹’이 생기듯, 이 병도 아름다운 병이다.

신춘문예. 굳이 말뜻을 풀이하자면 ‘새봄의 문학예술’이다. 그러나 신춘문예는 풀이하는 말이 아니라 그 자체로 뜻을 갖는 말이다. 문학을 지망하는 사람이라면 습작시절이라는 통과의례가 있고, 신춘문예는 그 통과의례 중 가장 치열한 과정의 다름 아니다. 그 치열함의 끝에 당도하는 사람만이 누리는 영광의 다름 아니다.

신춘문예 병은 신문사마다 1면에 신춘문예 현상공모 사고를 내는 11월초쯤 발병한다. 신춘문예라는 활자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가슴이 뛴다. 혈관 속에서 문학의 피가 끓는 소리가 들린다. 문제는 그런 흥분된 상태가 응모 마감일 까지 계속된다는 것이다.

계절은 언제나 가을이 끝나가고 겨울이 서서히 찾아오는 때쯤이다. 심장과 피는 더워지지만 몸은 추워지고 등은 불안감으로 굽어진다. 말수도 줄어들고 침묵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가끔씩 왜 그렇게 긴 한숨이 터져 나오던지.

그 시절을 겪은 나의 대학성적표는 감추고 싶은 흉터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신춘문예 병이 준 후유증이었다. 고백하자면 아슬아슬하게 낙제를 면한 점수다. 졸업학점이 1백60학점이었던 시절, 신춘문예 병 때문에 펑크난 학점을 맞춘다고 4학년 2학기에도 21학점을 신청해야만 했었다.

신춘문예의 마감과 학년말 시험기간은 늘 일치했다. 나는 그 두 길 앞에서 늘 미련도 없이 신춘문예의 길을 택했다. 친구들이 도서관에서 학년말 시험준비로 밤을 새울 때 나는 신춘문예 응모작품을 준비한다고 밤을 새웠다. 유신 시대, 군사독재 시대에서 학점을 얻기보다 신춘문예 당선시인 이란 이름을 얻고 싶었다. 언젠가 가지게 될 내 첫 시집의 약력에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빛나는 한 줄을 남기고 싶었다. 사범대학을 졸업하면 누구에게나 나오는 2급 정교사 자격증보다 먼저 시인이 되고 싶었다.

아직 그 시험답안지들이 남아있을까. 시험문제와는 무관한 글들만 써놓거나 백지로 제출했던 답안지들. 월영동 449번지, 나의 사랑 나의 대학. 사범대학으로 오르던 돌계단, 지칠 때마다 바라보던 푸른 합포만. 내 기억 속의 풍경들의 계절은 언제나 그 겨울이다. 사범대학 빈 강의실 한 구석에서 웅크리고 시를 쓰던 동면 직전의 곰 같았던 내 모습. 오지 않는 편지를 기다리며 우편함을 찾아가면 복도 쪽으로 눕던 긴 그림자. 환청처럼 갈가마귀 울음소리 들리던 시절.

더워졌던 피가 얼음처럼 차갑게 식는 기다림의 시간이 찾아오는 것도 신춘문예 병 후유증이다. 마감도 끝나고 시험도 끝나면 할 수 있는 일이란 낮에는 당선통지를 기다리는 일과 밤이면 술을 마시는 일 뿐이었다.

우체국에서 작품을 보내고 돌아와서부터 당선연락이 올 때까지의 그 막연한 기다림. 폭음과 함께 했던 확신과 장담은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고 불안해지고 마침내 허탈해진다.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당선 연락이 오지 않으면 더 이상 기다리지 말라는 동병상련 하는 도반들의 충고에도 혹시, 혹시 하며 기다리다 절망하다 받아보는 1월 1일자 신문. 그 신문에 실린 그 해 당선자들의 얼굴사진과 빛나는 작품들. 당선 시들을 읽은 뒤에는 지금까지의 기다림 보다 더 큰 부끄러움이 엄습했다.

그렇다. 그 부끄러움이 나를 성숙시켰다. 현재의 내 시가 어떤 자리쯤에 서있는지를 확인시켜주었던 부끄러움이 내 시의 뺨을 후려쳤다. 그리고 혹독한 추위의 겨울이 시작되고 뛰어난 그해 당선 시들을 읽으며 언젠가는 찾아올 내 문학의 봄인 신춘 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대, 그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문학을 꿈꾼다면 그 꿈은 욕심에 불과한 것이니, 다시는 신춘을 기다리지 마라.

분노도 시인을 만든다

지난 91년 도서출판 빛남에서 묶은 내 두 번째 시집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에 수록된 시편들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 숨막히는 더위

고물 선풍기가 뿜어주는 더운 바람 앞에서

나는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적의로 괴로워했다

아무도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미성숙의 벽에는 우울한 시대의 푸른 곰팡이가 피고

숨어서 김지하의 시들을 몰래 읽으며

늘 혁명 전야처럼 살고 싶었다

적의, 우울한 시대, 김지하, 혁명 전야,.그런 말들과 함께 나의 성년식이 시작됐다.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담임선생님이 권유하셨던 K은행 입행 대신 대학진학을 선택했다. 가장인 어머니의 가계는 여전히 가난했지만 아들의 장래가 걱정되셨는지 대학진학을 허락하셨다.

대학에 입학하고 내가 맨 처음 눈을 뜬 것은 시와 역사의 현주소였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교과서에 나오는 시들만이 시의 전부라고 알고 있었다. 문예부장까지 지냈던 상고시절 진해에서 마산까지 버스 통학길이 지루해 가끔 박인환의 시들을 외웠고, 내가 가지고 있던 시집은 김소월 시집과 백일장에서 부상으로 받은 윤동주 시집, 단 두 권뿐이었다. 대학에 입학해서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오던 시집들을 읽고 쇠망치로 머리를 때리는 같은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이런 시도 있으며, 시는 이렇게도 쓰는구나. 나는 비로소 작은 우물 밖을 나온 개구리였다. 그 개구리에게 시의 세상은 참으로 넓고 험했다. 그리고 그 때까지 내가 받은 문학교육이 편협됐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그런 현실에 절망하기 시작했다. 판금된 김지하 시집 필사본을 숨어서 읽으며 내가 살고 있던 시대에 분노하기 시작했다.

눈을 떠보니 교과서의 문학교육만 편협된 것이 아니었다. 역사는 왜곡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시월의 유신은 김유신과 같아서 삼국통일 되듯이 남북통일 되지요 라고 신나게 불렀던 유신의 실체는 남북통일을 막는 최대 장애였으며, 유신 시대는 그 때도 계속되고 있었다.

진해에 있던 대통령 별장 덕에 어린 시절 대통령 행차 길에 나가 고사리 같은 환영의 손을 흔들며 좋아했던, 중절모를 쓴 박정희는 일본 육사출신의 독재자였다. 절망은 분노를 낳는다.그 분노 앞에서 나는 시와 역사에 복무할 것을 선서했다.

대학 1학년 나는 야학 선생이 되었다. 고등학교 과정이었다. 나보다도 나이가 많은, 대부분 현장 노동자였던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들에게서 나는 더 많은 것을 배웠다. 대학 강의실보다 야학에서 배운 것이 더 많았다. 야학의 동료교사들 중에는 해군에 근무하는 학․석사장교들이 많았다. 그들에게서도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문학평론가 정과리 형도 야학에서 만났다. 그는 대학원을 마치고 해군사관학교 교수로 군복무를 했는데 야학에 동참했다. 마산 양덕에 있던 그의 아파트 서재는 내 문학수업의 바다였다. 사면을 빼곡이 채운 그의 이론서들이 나를 가르쳤으며 그와 밤을 새워 마시던 술이 나를 성숙시켰다.

그 시절 나는 자주 분노했다. 그리고 분노는 혁명의 꿈으로 이어졌다. 혁명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꿈은 꿈일 뿐, 내가 택할 수 있는 혁명의 방법은 시일 수밖에 없었다.

돌아보면 뒤틀린 현실과 바르게 흘러가지 않는 역사에 대한 분노가 시를 쓰게 만들었다. 시로써 현실에, 역사에 대해 혁명하고 싶었다. 야학 7년을 보내고 나는 야학일기 란 연작시로 당시 무크지였던 <실천문학>을 통해 분노의 시인이 되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분노도 없는 법.조국과 역사에 대한 사랑이 분노를 낳고 그 분노가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그대, 분노가 일면 터트려라. 분노도 시인을 만들기 때문이다.

펜혹이 시인을 만든다

펜혹이란 말이 있다. 컴퓨터 세대에게는 생소한 말일 것이다.

펜이나 연필로 글을 쓰는 사람의 손에는 반듯이 펜혹이 남아 있다. 오래 글을 쓰다보면 펜을 받치는 가운데 손가락에 혹 같은 굳은 살이 박힌다. 그것이 펜혹이다.

펜혹은 글쓰기의 상처다. 그러나 그 상처는 시인을 만들어 주는 통과의례와 같다. 나는 펜혹이 없는 시인의 손은 신뢰하지 않는다. 펜혹은 시인에게만 남는 상처가 아니다. 무릇 필업을 사는 사람들은 펜혹의 두께가 문학과 정신의 두께를 말해 준다.

대학시절 나는 내 손에 생기는 그 굳은 살의 이름을 몰랐다. 단지 보기 싫고, 불편했을 뿐이다.

어느 날 스승을 뵈러갔다 놀라운 모습과 조우하고 말았다. 스승은 칼로 펜혹을 깎아내고 계셨다. 사면이 책으로 둘러싸인 스승의 방에는 작은 판 하나가 놓여져 있고 그 위에 2백자 원고지가 펼쳐져 있었다. 무더운 여름이었고, 스승은 그 때 ‘한국문학사’를 집필하고 계셨다.

푸른 칼날을 가진 연필깎이 칼로 가운데 손가락의 굳은 살을 베어내며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평생 펜으로 글을 쓰다보니 장지에 펜혹이 생겼어. 자주 깎아내지 않으면 글을 쓸 수가 없어.”

스승의 글쓰기는 그 펜혹이 대변해주었으며 스승은 펜혹으로 글쓰기가 불편해지면 칼로 굳은살을 깎아내고 다시 글을 쓰셨다. 한 편의 논문이 완성되기까지,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기까지 스승은 얼마나 많은 당신의 살을 깎아내셨을까. 나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동시에 느꼈다. 스승의 펜혹은 산과 같은 모습이었고, 내 펜혹은 흔적에 지나지 않았다. 스승의 펜혹은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글쓰기는 자신의 살을 깎아내는 고통이며, 그 고통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그 이후 펜혹은 내 습작시대의 화두였다. 나도 펜혹이 생기도록 시를 썼고, 펜혹을 깎아내며 시를 썼다.

진해시 여좌동 3가 844번지. ‘옛집 진해’에서 습작시대를 보냈다. 나는 대학생이었으며, 아내와 두 아이를 둔 가장이었다. 시대는 질곡의 80년대 초였다. 역사는 표류하고 있었고, 미래는 불투명하고 불안했다. 취하지 않는 밤이면 연습장 위에, 노트 위에 시를 적었다. 모나미 볼펜을 꼭 잡은 손가락에 펜혹이 자라고 새벽이면 머리 위에 파지가 무더기로 쌓였다.

그 시절 모든 문학도의 꿈이 그러했듯이 나도 신문사로부터 노란색 신춘문예 당선전보를 받고 싶었다. 그것이 삶의 유일한 목표였고 그 목표점에 도달하기 위한 글쓰기가 내 삶의 전부였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학년말 시험을 포기하고 원고지 위에 피 같은 시를 써 투고를 했다. 그리고 오래 동안 집에서 당선 전보를 배달해 줄 우체부의 오토바이 소리를 기다렸다. 우체부는 찾아오지 않았다. 새해 첫날이면 진해의 6개 중앙일간지 신문지국을 돌며 1월1일자 신문을 빠짐없이 구해 당선자 명단을 확인하며 절망했다. 그 당시 유행했던 대학생 현상문예에서 함께 활동했던 하재봉 안재찬(류시화) 안도현 등이 신춘문예를 통해 화려하게 시인으로 등단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더욱 절망했다.

그러나 나는 다시 시를 쓸 수밖에 없었다. 시를 쓰는 일이 나에게는 전부였다. 습작시대였던 대학시절, 나는 시만 썼다. 강의실에서도 고개 숙여 시를 썼으며 자면서도 시를 생각했다. 펜혹은 점점 커졌으며 그 상처를 자주 깎아냈다. 그리고 펜혹 덕분에 대학 4학년 겨울, 나는 신춘문예 당선 전화를 받았다.

문예창작과 첫 강의에서 나는 언제나 학생들에게 ‘책을 손으로 읽어라’고 가르친다. 펜으로 문학작품을 옮겨 적으며 손가락에 펜혹이 생기도록 문학에 최선을 다하라고 말한다. 컴퓨터 시대라해도 누구도 펜혹이라는 상처가 없이 시인을 꿈꿀 수 없기에.

사랑도 시인을 만든다

그대, 4월의 진해를 기억하는가. 눈이 귀한 남쪽의 부동항 진해는 4월이면 눈이 내렸다. 그 작은 도시의 인구수와 비슷한 벚나무들은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4월이 오면 일시에 꽃을 피우고 바람이 불면 꽃잎을 눈처럼 뿌려주었다.

꽃이 피어서 질 때까지, 그 기간 동안 ‘군항제’란 잔치가 열렸다. 그랬다. 그것은 축제라는 현대성을 띤 이름보다 잔치였다.

내가 5학년 1학기까지 다녔던 도천초등학교 주변에 만들어 진 벚나무 숲. 어른들이 ‘사쿠라 마찌’라 부르던 그 곳이 벚꽃 잔치의 장이었다.

잔치의 하객은 후줄근한 양복에 중절모를 쓴 남자들과 한복과 고무신을 신은 여자들. 그들은 장구와 꽹과리로도 최신 유행가의 가락을 맞추고 잔치의 끝은 언제나 술과 노래였다. 그리고 잔치가 끝나면 그 파장 위로 자주 봄비가 내렸다.

세상은 빠르게 변했다. 새로운 봄이 찾아올 때마다 도시의 증가하는 인구처럼 늘어나는 벚나무들은 더욱 화사한 설국을 만들고 잔치는 축제로 변했다. 분수탑 로터리에서 해군 군악대 연주와 의장대의 시범이 열리고 그 모습에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축제의 밤이 찾아와 도심의 벚나무에 걸린 축등에 불이 켜지고, 밤하늘에는 현란한 폭죽이 터졌다.

흑백TV도 귀했던 시절, 4월이면 밤하늘에 상영되는 총천연색의 불꽃놀이를 보면서 유년을 보냈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생의 축복. 그 4월에 나는 첫사랑을 했다.

중3이 되었다. 나는 ‘눈물이 많던 아이’에서 ‘시를 쓰는 소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아버지를 잃은 나는 사람들이 꽃이 피는 축제의 기쁨만 알 뿐, 꽃이 지는 축제 뒤의 슬픔은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축제의 즐거움 보다 축제가 끝난 뒤의 비 내리는 파장을 좋아했다.

축제의 항구도시를 찾아 밀물처럼 몰려온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만들어 놓는 또 다른 바다에서 나는 작고 외로운 섬이 되어 홀로 있는 것을 좋아했다.

바람에, 혹은 비에 떨어진 꽃잎을 밟으며 슬픔의 시를 쓰는 소년으로 변해버려, 문예반 선생님은 나이보다 조숙한 눈물의 시를 쓰는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시곤 했다.

내가 다니던 중학, 진해남중은 바다가 보이는 산중턱에 자리한 하얀 건물이었다. 나는 교실에서 바다를 볼 수 있는 것이 좋았다. 남쪽으로 열린 창문을 통해 빛나던 푸른 바다와 작은 섬들. 무시로 찾아오던 건강한 소금 바람. 봄이면 운동장 아래 보리가 누렇게 익고, 가을이면 등교길이 되던 코스모스 꽃길. 그 시절 내가 한 첫사랑은 나에게 기쁨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다. S.영문 이니셜로 호명할 수밖에 없는 그녀. 그 때까지 내 감정의 전부였던 슬픔을 비워내고 그 자리에 기쁨을 채워주었던 소녀.

우리는 4월, 벚나무 아래에서 처음 만났다. 진해역 옆 청산학원 앞에 서있던 벚나무였다.(불행하게도 그 나무는 지금은 베어지고 없다.) 친구의 소개로 만난 우리는 단숨에 가까워졌다.

나는 시를 쓰듯 사랑의 편지를 보냈다. 그 동안 내가 썼던 어느 글보다 아름다운 글을 소녀의 주소로 보냈다. 그 편지들은 내 최초의 사랑시편들이었고 소녀는 최초며, 유일한 독자였다.

같은 도시에 살고 있었지만 멀리 떨어져 있었던 우리는 그 때 아름다운 약속 하나를 했다. 아침마다 라디오에서 알리는 7시 시보 소리에 맞춰 서로를 그리워하는 성냥불을 켜기로 했다. 성냥불을 밝히며 나는 그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모든 첫사랑이 그러하듯 나의 첫사랑도 이별로 끝나버렸다. 기쁨이 자리했던 가슴에 다시 슬픔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 슬픔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의 슬픔처럼 나를 눈물 많은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다. 눈물대신 나는 시를 택했다. 사랑이, 첫사랑이 내 시를 더욱 튼튼하게 만들어 주었다.

 

출처: https://cafe.daum.net/yes56do/FH2C/710?svc=cafea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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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소문 속에 있던 김수영의 부인 김현경의 자전적 에세이를 읽는다. 무성한 소문 속, 당사자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작가 소개]
1927년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서 출생
경성여자보통학교(현 덕수고등학교)와 진명여고를 거쳐 이화여대 영문학과에서 수학
정지용 시인에게 시경을 배움
'일본 전위파' 문학과 프랑스 문학에 심취함
김수영과 결혼해 장남 준과 차남 우를 두었음
신문로, 동부이촌동 등에서 의상실을 경영했으며
이후에는 미술 컬렉터 미술 디렉터로 활동했다.


[김수영]
1968년 인도로 침범한 버스에 치여서 유명을 달리함

[익혀야 할 것들]
인간의 원형적 고독감

"뭉크한테서는 에스프리(정신) 같은 것이 감전돼 와, 물론 피카소나 베토벤이 한 수 위지만. 피카소나 베토벤은 내가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악마적 존재야."

'반공 포로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다'
"아. 그러나 나는 온갖 것이 다 정지된, 포로수용소에서 그 침체의 연속을 벗어나기 위해서, 내 손으로 매일 내 생니 하나씩을 흔들어 뽑았어. 그 답답한 시간을 나는 이를 빼는 아픔을 스스로에게 가함으로써 견딜 수 있었고, 또 견디어내야 했어. 나에게 이가 빠지는 아픔이 있다는 것은 바로 내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만드는 것이었어.
나는 내 이를 빼면서 큰 힘을 얻었지. 그리고 나날이 한 개씩 없어지는 이빨을 보면서, 새롭게 내 정신을 가다듬고 내 시의 구심점이 사랑에 있다고 굳게 마음먹었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생니를 뽑으며 버텼다니 생각만 해도 그 슬픔이 느껴져 가슴이 아프다. 젠장, 뭐가 이따위야. 사는게 왜 이리 고달픈가. 기득권 유지를 위해 너무 많은 사람들의 피가 필요한 세상이라니.

김수영의 일과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것 들
금연
금주
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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섶섬이 보이는 방 / 나희덕
- 이중섭의 방에 와서


서귀포 언덕 위 초가 한 채
귀퉁이 고방을 얻어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방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그 방에서
게와 조개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묻어온 모래알이 버석거려도
밤이면 식구들의 살을 부드럽게 끌어안아
조개껍데기처럼 입을 다물던 방,
게를 삶아 먹은 게 미안해 게를 그리는 아고리와
소라껍데기를 그릇 삼아 상을 차리는 발가락군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던 석회질의 방,
방이 너무 좁아서 그들은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높이 가질 수 있었다
꿈 속에서나 그림 속에서
아이들은 새를 타고 날아다니고
복숭아는 마치 하늘의 것처럼 탐스러웠다
총소리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섶섬이 보이는 이 마당에 서서
서러운 햇빛에 눈부셔 한 날 많았더라도
은박지 속의 바다와 하늘,
게와 물고기는 아이들과 해질 때까지 놀았다
게가 아이의 잠지를 물고
아이는 물고기의 꼬리를 잡고
물고기는 아고리의 손에서 파닥거리던 바닷가,
그 행복조차 길지 못하리란 걸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알지 못한 채 살았다
빈 조개껍데기에 세 든 소라게처럼


*화가 이중섭과 그의 아내가 서로를 부르던 애칭

- 제22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작품집 『섶섬이 보이는 방』(문학사상사, 2007)

섶섬: 제주 서귀포시 보목동

이중섭(1916~1956)이 제주 서귀포에 머물렀던 기간은 1951년 1월에서 같은 해 12월까지 약 11개월간이다. 그의 나이 35살 때였다. 6.25 전쟁이 발발해 전국을 떠돌며 피난생활을 이어가는 중 가족과 함께 제주를 찾아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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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mijumunhak.net/taesookim/board_14/127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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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출처

http://www.kb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925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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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달린다1

https://youtu.be/aj2IESFvbBE

바람처럼 달린다2

https://youtu.be/0crII_wHwFM

눈을 감아야 더 잘 보인다

https://youtu.be/VuoNfdMjUOw

달빛을 깨물다/시 이원규/낭송 조영실

https://youtu.be/zlaxBGp7Ugo

달빛을 깨물다/시 이원규/낭송 이유민

https://youtu.be/sXXN7NOW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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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hankyung.com/opinion/article/201807126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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