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독과 낭송에서 포즈(pause, 일시적인 멈춤)만 제대로 구현해도 그 수준이 확 달라진다. ‘낭독과 낭송의 70%는 포즈에서 이루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즈는 낭독과 낭송의 중심고리다. “휴지(休止)나 사이가 없다면, 즉 포즈를 구현하지 못한다면 템포나 리듬의 변화도 없을 것이며, 억양과 어조의 생명력도 살아날 수 없다.”(김홍철). 이처럼 포즈는 낭독과 낭송에서 무척 큰 비중을 차지한다. 정확한 포즈는 자신과 청중에게 텍스트의 의미를 정확히 전달할 수 있다. 나아가 텍스트의 화자 심리를 청자에게 정확하게 전할 수도 있다. “포즈의 위치만 바꿔도 얼마든지 다양한 정신 상태를 만들어낼 수 있다.”(스타니슬랍스키). 논리적 포즈가 단어를 하나의 그룹으로 묶어주고, 그 묶인 그룹은 다른 그룹과 분리되는 기능을 지니기 때문이다.

말을 할 때에는 모국어 본능이 작동돼 포즈의 오류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포즈의 오류는 주로 텍스트를 읽을 때 자주 발생한다. 쓰기에서 띄어쓰기는, ‘문법’에 따라 띄어쓰기의 원칙대로 쓰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읽기에서 띄어 읽기는, ‘어법’에 따라 띄어읽기의 원칙대로 띄어 읽으면 된다. 문법과 어법이 다르기 때문에 읽을 때는 어법에 따라 읽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텍스트를 읽을 때 흔히 띄어쓰기(문법)대로 띄어 읽는 오류를 범한다. 쓰기에 따른 문법대로 띄어 읽는 바람에 대부분 어색한 읽기가 돼버린다. 치명적 오류가 일반화된 상황이다.

낭독과 낭송은 자연스러움이 가장 큰 미덕이다. 말하듯, 노래하듯 읽는 수준이 최고의 낭송 수준이다. 고대 그리스인은 시를 가리켜 ‘ta mele’로 불렀다. 이는 ‘노래로 불리기 위한 시’라는 뜻이다. 시인 에드워드 히르시는 “시는 언제나 말과 노래 사이를 거닐어왔다”고 했다. 포즈의 기본을 익혀 텍스트를 말하듯, 구술담화형식으로 구현한다면 낭독과 낭송은 분명 달라질 것이다, 히르시의 말마따나 ‘말과 노래 사이를 거니는’ 수준까지 갈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포즈에서 흔히 범하는 오류는 다섯 가지쯤 된다. 첫째, 관형사에 명사가 이어진 문장에선 붙여 읽어야 하는데도, 띄어 읽는 오류다. 그런데 만일 관형사와 명사 사이에 ‘수식어’가 들어간 경우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이런 땐 관형사에서 띄어 읽어야 한다. 둘째, 선택의 의미가 없는 관형사는 띄어 읽어야 하는데, 붙여 읽는 오류도 흔히 나타난다. 셋째, 소유 관계에서 내게 속한 표현은 붙여 읽어야 하는데, 띄어 읽는 오류. 넷째, ‘속성의 의미가 있는 경우’에는 띄어 읽어야 하는데, 붙여 읽는 오류. 다섯째, 관심의 중심에 따라 관심사가 앞에 있는 경우 붙여 읽고, 관심의 초점이 뒷 문장에 있을 경우엔 띄어 읽어야 하지만, 이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오류다.

한편 한국어에서 지켜야 할 포즈의 기본은 대체로 일곱 가지다. 1) ‘주격 조사’에서, 2) ‘연결어미’에서, 3) ‘문장부호’에서, 4) ‘독립언(감탄사·제시어·부름말)’에서, 5) ‘부사·부사절’에서, 6) ‘육하원칙’에서, 7) ‘강조하는 문장’ 앞에서 띄어 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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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가의 소소한 단상] 낭독과 낭송에서의 포즈

낭독과 낭송에서 포즈(pause, 일시적인 멈춤)만 제대로 구현해도 그 수준이 확 달라진다. ‘낭독과 낭송의 70%는 포즈에서 이루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즈는 낭독과 낭송의 중심고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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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아버지가#방에들어가셨다” 또는 “아버지가//방에들어가셨다”라고 읽는다. 이는 둘 다 그릇된 띄어읽기다. 이야기를 더 진척시키기 전에 먼저 [/]은 ‘반휴지’, [#]은 ‘보통휴지포즈’, [//]은 긴휴지의 기호라는 것을 밝힌다.

주격조사 다음에 휴지를 두어야 하는 것은, 포즈의 기본 원칙. 하지만 이번엔 휴지를 주지 말고 이렇게 읽어보자. “아버지가방에들어가셨다.” 그리고 이어서 바로 반휴지를 두어 “아버지가/방에들어가셨다”를 읽어보자. 어떤 차이가 있는가?!

주격조사 ‘가’와 ‘방’ 사이에 휴지가 있을 때와, 그냥 붙여 읽었을 때에 그 시간상의 차이는 거의 없다. 그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붙여 읽었을 때 조사 ‘가’와 ‘방’ 사이엔 굴곡이 전혀 생기지 않으나, 반휴지를 주었을 땐, 굴곡이 생긴다. 하여 반휴지를 ‘억양휴지’라고도 한다. 둘의 차이를 좀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예를 한 가지 더 든다. “나는/학교에갔다”와 “나는#학교에갔다, 나는//학교에갔다”를 이어 읽어보며 차이점을 느껴보자. “나는#학교에갔다, 나는//학교에갔다”에선, 주격 조사 뒤 학교의 ‘학’이 높은 음에서 출발하는 반면, “나는/학교에갔다”에서처럼 반휴지를 두었을 때는, ‘학’이 조금 아래에서 출발해 올라가는 ‘억양’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늘 자연 상태에서의 발화에선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인위적 읽기에선 그리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해와 훈련이 필요하다. 연극의 대본 읽기에서든, 시낭송에서 읽기 과정에서든 모두 마찬가지다.

음절·단어·어절·구·행·연 사이에 자리 잡은 쉼의 길이는, 동일하지 않다. 각기 다른 쉼은, 각각 다른 분별과 판정과 반성과 사색의 기회를 제공한다. 시어(詩語)에는 저마다의 울림이 있다.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로 선택된 단어 하나하나에는 물론이고, 맥락 속에서 새로워진 의미가 담긴다. 거기엔 분명 어떤 득의와 근심과 회피와 무관심 같은 생각과 정조가 깃들었다. 우리가 문자 텍스트를 단순하게 ‘음성적으로만 실현’해서는, 그 정조의 울림에 가닿을 수 없다. 자연스러운 쉼과 울림의 질서와 흐름을 타야 한다. 쉼은 지속을 통해 의미를 얻고, 지속은 울림을 얻을 때, 그때 비로소 풍부하게 의미가 구현된다.  

자연스러운 낭송을 하려면 소리에 민감해야 한다. 특히 낭송가는 자신이 어떻게 말하는지 깊게 생각해야 한다. 그에게 있어 말이란 ‘예술의 도구이자, 예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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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가의 소소한 단상] 휴지(休止, pause)의 종류와 ‘반(半)휴지’

휴지(休止)는 ‘포즈(pause)’, ‘쉼’, ‘띄기’, ‘띄어 읽기’, ‘끊어 읽기’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여태 통일된 개념으로 정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휴지의 주요 기능은 ‘호흡’, ‘의미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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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 양반’이 이거 왜 이래?” 맥주집 앞에서 시비가 붙은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이 문장에서 관형사 ‘이’에 이어진 명사 ‘양반’은, 붙여 읽어야 한다. 아무 생각 없이 말할 때는, 외려 제대로 잘 붙여 말한다. 모국어의 본능이 작동되기 때문이다.

반면 말하기가 아니라, 글로 된 문장을 읽으라고 하면 꼭 띄어쓰기대로 띄어 읽는다. 오류다. 학교에서 문법은 배웠어도 어법은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저 띄어쓰기대로 띄어 읽으면 되는 줄 알고 흔히들 그리 읽는다. 관형사에 명사가 이어지는 문장에서 문법에서는 띄어 쓰는 게 맞고, 어법에서는 붙여 읽는 게 맞다. 관형사가 이 사람이 아닌 그 사람, 혹은 그 사람이 아닌 저 사람이라는 ‘선택적 성격’을 지닐 땐, 붙여 읽어야 한다. “아니, ‘이양반이’ 이거 왜 이래”처럼 말이다. 시로 예를 들어 보자. 한글날도 곧 다가오니, 오세영 시인의 <아아, 훈민정음>이 좋겠다. “그러나 이 땅, 그 수많은 종족의 수많은/ 언어 가운데서 과연/ 그 어떤 것이 신(神)의 부름을 입었을 손가./ 마땅히 그는 한국어일지니” 이 시에서 ‘이 땅’은, “이땅”처럼 관형사와 명사를 붙여 읽어야 한다. ‘이 땅’은 이 나라를 뜻한다. 다른 나라가 아닌 이 나라(=우리나라)를 뜻한다. 선택적 성격을 지닌 지시 관형사 ‘이’에 이어진 명사는, 반드시 붙여 읽어야 한다. 자연스러운 낭독과 낭송은 거기서 나온다. 그것이 포즈의 기본이다.

신발을 사러 갔다. 주인장이 파란 신발을 들어 보이며 “이 신발로 드릴까요?” 하고 물었더니 “아뇨, 저 빨간 신발로 주세요” 하며 손님이 말했다. 앞 문장의 ‘이 신발’은, 붙여 읽는 게 당연하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선택적 성격이니까. 그러면 뒤 문장 “저 빨간 신발”은, 어떻게 읽을까. 이때는, “저/빨간신발”처럼 관형사 다음에 띄어서 읽어야 한다. 관형사와 명사 사이에 수식어가 있을 땐, 띄어서 읽어야 하는 게 포즈의 원칙이다. 위의 오세영 시 속 ‘그 수많은 종족’도 역시 “그/수많은종족”처럼 관형사 다음에 띄어야 한다. 관형사와 명사 사이에 수식어가 있을 때는 띄어 읽어야 자연스럽다. 그것이 포즈의 기본이다.

몇 가지 정리하면서 익혀 보자. ‘이신발(0), 이/신발(×)’. ‘이땅의아들(0), 이/땅의아들(×)’. ‘저/빨간신발(0), 저빨간신발(×). ‘저산(0), 저/산(×)’. 저/뾰족한산(0), 저뾰족한산(×). ‘형이라는 그사람도(0), 형이라는 그/사람도(×)’, 그/형이라는 사람도(0), 그형이라는 사람도(×). 헷갈릴 수도 있다. 그래도 조금 익혔으면, 다시 시를 보고 읽어보면서 정확한 포즈로 읽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를 몸으로 느껴보자. 이상화 시인이 스스로 자신의 대표 시라고 한 <역천>의 첫 연 첫 행을 보자. “이때야말로 이 나라의 보배로운 가을철이다” 한 번은 “이때야말로 ‘이나라’의 보배로운 가을철이다”로, 또 한 번은 “이때야말로 ‘이/나라’의 보배로운 가을철이다”로 읽어보고 그 차이를 몸으로 느껴보자. 다음은 <역천> 3연의 1행이다. “이런 때 이런 밤 이 나라까지 복되게 보이는 저편 하늘을” 역시 “이런 때 이런 밤 ‘이나라까지’ 복되게 보이는 저편 하늘을...”으로 한 번, “이런 때 이런 밤 ‘이/나라까지’ 복되게 보이는...”으로, 또 한 번 읽어보고 차이를 생각해보자. 포즈의 기본을 느껴보자.

‘관형사+명사로 된 문장에서 띄어읽기’의 마지막으로 ‘관형사에 선택의 의미가 없는 경우’를 보자. 이때는 관형사 다음에 띄어 읽어야 한다. “그 술 좀 그만 마셔라” 라는 문장에서의 관형사 ‘그’는, 선택의 의미가 없다. 이때의 술은, 소주·맥주·양주 중의 하나가 아니라, 단지 관습에 따라 붙인 관형사이지 선택의 성격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술 좀 그만 마셔라”처럼 읽어야 한다. 그것이 포즈의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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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가의 소소한 단상] 포즈(pause), ‘띄어읽기’의 실제1 - ‘관형사+명사’로 된 문장

“아니, ‘이 양반’이 이거 왜 이래?” 맥주집 앞에서 시비가 붙은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이 문장에서 관형사 ‘이’에 이어진 명사 ‘양반’은, 붙여 읽어야 한다. 아무 생각 없이 말할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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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조명희 문학관, 포석 죽음에 대한 진실 문서 3부 등 일반에 공개 - 동양일보

[동양일보 김진식 기자]포석선생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실이 담긴 문서 3점과 선생의 초상화가 일반에 공개된다. 26일 조명희 문학관에 따르면 지난 5월 열린 포석조명희문학제에 러시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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