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이 놓친 장음] ― ‘술 주(酒)’

'소통의 더없는 매개물'이기도 하고, 때론 '악마의 피'이기도 한 술. 그 '불의 물'이라는 ‘술 주(酒)’의 장음에 대해 살펴본다.

『한한대자전』(2351쪽)에 따르면 ‘술 주(酒)’는, 가장 긴소리인 상성(上聲)이다. 손종섭(2016)은, ‘술 주(酒)’가 거성화 되었다고 한다. 우리말에서 ‘술 주(酒)’는, 이제 상성이긴 상성이되, ‘거성화된 상성’이 된 것이다. 상성이 가장 긴소리고 거성은 상성 다음으로 긴소리다. 상성과 거성은 모두 장음으로 표기된다. ‘술 주(酒)’는 결국 다소 짧아졌다 뿐이지, 여전히 장음으로 길게 발음되어야 하는 말이다.

그런데 ‘발음 사전’을 포함한 ‘한국어 사전’에는, ‘술 주(酒)’를 모두 단음으로 발음하라고 지시한다. 이는 수정되어야 할 오류다. 따라서 ‘술 주(酒)’는, 다음과 같이 모두 장음으로 발음해야 한다. “주ː객[酒客]/주ː량[酒量]/주ː막[酒幕]/주ː모[酒母]/주ː사[酒邪]/주ː색[酒色]/주ː점[酒店]/주ː정[酒精]”. 그런데 사전은 왜 그런지 “주정(酒酊)”만은 [주ː정]이라고 장음으로 정확하게 적어놓았다. 다행한 일이다.
  
  “한때 저녁이 오는 소리를 들으면 세상의 모든 ‘주ː막[酒幕]’이 일제히 문을 열어 마치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것처럼 저녁을 거두어들이는 듯했다” (허수경, 「저녁 스며드네」, 2연).

  “친구네 퀴퀴한 ‘주ː막집[酒幕집]’ 뒷방에서 몰래 취하거나/ 아니면 도랑을 쳐 얼개미로 민물새우를 건지면서” (신경림, 「그리고 나는 행복하다」, 2연 6~7행).

  “‘주ː모[酒母]’의 사투리 안주 삼아/ 막걸리 잔 위에서도 고향은 철철 넘친다” (문병란, 「나의 영산강」, 2연 4~5행).

  “‘주ː사[酒邪]’ 한 그릇” (정진용, 「주사(酒邪) 한 그릇」, 제목).

  “사랑한다는 것은/ 학각시가 자기 깃털을 뽑아 길쌈을 하기이고/ 그 남편이 그 베를 팔아 모은 살림을 ‘주ː색[酒色]’잡기로 탕진하기입니다.” (한승원, 「사랑한다는 것은―열애일기·27」, 제목).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ː점[酒店]’에 앉아 있을 것이다” (황지우,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2연 1행).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ː정[酒酊]’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려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삼춘엄매 사춘누이 사춘동생들” (백석, 「여우난곬족」, 2연 4행).

  “지금도 밤늦게 ‘술-주ː정[술酒酊]’ 소리가 끊이지 않는” (신경림, 「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 단연 9행).

  “소주의 주원료인 ‘주ː정[酒精]’ 가격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인상된다.” (경남신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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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url.kr/ipts5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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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운론에 대한 소소한 단상] ― ‘우리가 몰랐던 발음, 사랑’

   사랑.
   이 말은, 시어에 참으로 많이 나오는 말이다. 오늘 읽은 김승희 시인의 <내어주기>에도 ‘사랑’은, 다섯 번이나 출현한다. 저 중요하고도, 소중한 말, '사랑'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이 시어를 제대로 읽으려면 우리는 천생 사전을 뛰어넘어야 한다. 교육이 교사의 질을 넘지 못하듯, 낭독과 낭송의 질은 사전의 질을 넘어설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저 사전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슬프게도 사전의 오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흔하다. 게다가 일반적 국어사전뿐 아니라, 표준이라는 말을 떡, 하니 갖다붙인 <한국어 발음 사전>마저 저 오류의 늪에서 허우적거린다. 그중에 하나가 ‘사랑’이다.

   한국어 사전에서는 ‘사랑’을 그저 [사랑]이라 적어 놓았다. 오류다. 사랑의 음운은 다음과 같다. “사랑”의 첫음절 ‘사’는, 단음이다. 그리고 둘째 음절 ‘랑’은 장음이다. 사랑의 장단음은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과 <동국정운(東國正韻)>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들은 음운론 서적이다. 쉽게 말하면 ‘발음 사전’이라는 것이다. 장음의 음절에 방점을 찍어 놓아 길게 읽으라고 해놓았기 때문이다. 아주 긴소리인 ‘상성(上聲)’에는 방점 두 개를, 긴소리인 거성(去聲)에는 방점 한 개를 찍어놓았다. 그리고 단음에는 방점이 없다.

   사랑처럼 첫음절이 단음이고, 이어진 둘째 음절이 장음일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 말은 어떤 조건 속에서나 고정돼 똑같이 있지 않고, 변화한다. 변화는 다음과 같다. 장음 앞에 높인 단음 음절은 아연 긴장하여 돌연 더욱 짧아지며 그 높이도 더 높아진다. 단음은 원래 짧을 뿐 아니라, 높은 소리다. 그 소리가 더욱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음절의 장음은 그 장음의 길이가 그대로 유지된다. 그래서 사전에서 제시된 것처럼 사랑은 각각 한 박자씩의 단음이 아니다. 첫음절이 극단음화되고, 둘째 음절은 장음으로 발음되는 소리다. 이를 일러 ‘평고조(平高調)’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이 평고조를 수용하는 학자도 있고, 당최 모르는 학자도 있으며, 인정해야 하는지 어리둥절하는 학자도 있다. 그런데 어찌됐든 평고조 현상을 이해하고 그리 읽으면 자연스러운 한국어 발화가 어느결에 쑥 들어오는 건 분명하다.

   한 가지 더. 극단음화된 '사'를 발음할 때는, 여느 소리와 같이 시작해선 안 된다. 조금 늦게 들어가야 한다. 그러니까 ‘못갖춘마디’처럼 ‘반의 반박자(16분쉼표)’ 내지는 반박자(=8분음표) 늦게 들어가야 그 원래의 소리가 제대로 구현된다.

   시낭송가는, 우리나라 사전학의 변화를 그저 목매고 기다릴 수만 없다. 잘못된 발음의 가장 도드라지게 나타나는 장르가 시낭송이기 때문이다. 여느 장르인 연극이나 내래이션 등은, 그 발음상의 오류가 그리 심하게 드러나지 않은 편이다. 그러므로 발음에서의 목마른 자는, 우선 시낭송들이다. 목 마른자가 우물 판다. 한국어의 사전편찬자들 덕분에 한국어 사전과 발음사전, 사성(四聲), <훈민정음 해례본>까지 보게 된다.

   사전을 살펴 익히고, 나아가 사전의 한계를 뛰어넘는다면, 한국에서 시낭송의 새지평이 활짝 열릴지도 모를 일이다. 유의미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모가지가 좀 아파서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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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url.kr/s5j47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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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이 놓친 장음] ― ‘기차(汽車) [기ː차]’

   “기차(汽車)”의 첫음절 ‘김 기(汽)’는, ‘거성(去聲)’으로 장음이다. 거성은, 상성(上聲) 다음으로 긴소리다. 둘째 음절 ‘수레 차(車)’는, 평성으로 단음이다. 따라서 [기ː차]로 발음된다.

   그러나 ‘한국어사전’과 ‘한국어발음사전’에는, ‘기(汽)’를 모두 단음으로 발음하라고 지시한다. 오류다. 거성 중에 평성화된 글자가 24개가 있다. 하지만 이 중에 ‘기(汽)’는, 포함되지 않는다. 상성과 거성은, 장음으로 구분된다. 그러므로 사전에서 ‘기(汽)’를 단음으로 발음하라는 것은, 수정되어야 한다.

   “기차/기차역/기찻길/기적소리”의 첫음절 ‘기(汽)’는, [기ː차], [기ː차역],  [기ː찻길], [기ː적소리]처럼 모두 장음으로 발음해야 한다.
   ① “기ː차[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면 우주 정거장엔 햇빛이 쏟아지네” (「은하철도999」)
   ② “봄이 오면 기ː차[기차]를 탈 것이다” (강은교, 「기차」, 1연 1행).
   ③ “낯선 기ː차역[기차역]에 잘못 내려본 적이 있는지” (김경미, 「잘못 내린 기차역에서」, 1연 3행).
   ④ “기ː찯낄[기찻길] 건널목에 붉은 글 씨를 써놓은 말 섯!” (오봉옥, 「섯!」, 단연 4행).
   ⑤ “기ː적소리[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김수영, 「봄밤」, 2연 5행).
   ⑥ “경성의 어두운 기ː차역[기차역] 화물칸, 전라도 경상도, 팔도 사투리도 들렸다.” (김종철, 「튀어나온 못이 가장 먼저 망치질 당한다―위안부라는 이름의 검은 기차」, 1연 둘째 문장).

   그런데 “기적(奇蹟)”의 첫음절 ‘기이할 기(奇)’는, 평성으로 단음이다. [기적]처럼 짧게 발음해야 한다.
   ① “초록빛과 사랑: 이거 / 우주의 기적[기적(奇蹟)] 아녀” (황지우, 「발작」, 단연 10~11행).
  
   강은교 시인의 시 「기차(汽車)」에는, 기차라는 시어가 제목을 포함해 여섯 번 나온다. 단음으로 잘못 발음하면 여섯 번 틀리게 읽는 것이 되고, 장음으로 제대로 발음하면 여섯 번 잘 읽게 된다.

   기차 / 강은교

   봄이 오면 기차를 탈 것이다
   꽃 그림이 그려진 분홍색 나무의자에 앉을 것이다
   워워워, 바람을 몰 것이다

   매화나무 연분홍 꽃이 핀 마을에 닿으면
   기차에서 내려
   산수유 노란꽃잎 하늘을 받쳐 들고 있는 마을에 닿으면
   또 기차에서 내려
   진달래 빛 바람이 불면
   또또 기차에서 내려

   봄이 오면 오랜 당신과 함께 기차를 탈 것이다
   들불 비치는 책 한 권 들고
   내가 화안히 비치는 연못 한 페이지 열어 제치며

   봄이 오면 요기여기 봄이 오면
   당신의 온기도 따뜻한 무릎에 나를 맞대고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여행을 떠날 것이다
   은난초 흰 꽃 커튼이 나풀대는 창가의 의자에 앉아
   광야로 광야로
   떠날 것이다. 푸른 목덜미 극락조처럼 빛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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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url.kr/dprmy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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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소한 단상] ― ‘바다의 날, 닥치고 끄적끄적’

  이틀 동안 감기를 된통 앓고는 좀 나아지는 줄 알았는데, 몸살의 근육통이 자지러지게 쿡쿡 쑤신다. 끙끙거리며 결국 병원에 가 주사 한 대 맞고, 약 타 와서 먹고 잔다. 아프지 않고, 푹 자고 일어나니 좀 살 것 같다. 하루 한두 편씩 꾸준히 써봐요, 라는 후배 말에 “그러지 뭐”라고 내뱉은 요누무 주둥아릴 콕 쥐어박고 싶은 날이다. 그래도 참 다행한 일이다.

  바다는 모든 생명의 원천이다. 그래서 그런지 영원성을 상징하는 원형적 이미지를 품는다. 융(C. G Jung)이나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그리고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바다를 ‘죽음과 재생’, ‘창조와 소멸’, ‘시초와 종말’이라는 이원론적 구조로 파악한다.
  작가의 세계관은, 철학이나 이론이 아니라 ‘이미지’로 드러난다. 한국 근대시가 ‘바다’를 중심으로 출발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우리의 근대 의식이 바다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는 걸 암시한다.

  최초의 신체시라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바다는, 하나의 독립된 제재로 다뤄진다. 낡고 권위적이며 불합리한 걸 제거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 절대적 존재의 상징으로 바다를 내세운다. 단순한 시적 소재가 아니라, 역사에 대응하는 문학 이념의 실천을 위한 세계로 수용한 것이다. (그런데 최초의 신체시라는 저 시의 제목이 참 ‘거시기’하긴 하다.)

  임화가 “현해탄은/ 우리들의 운명과 더불어/ 영구히 잊을 수 없는 바다”라고 했을 때, 바다는 ‘신지식의 공급로’였으며, ‘문화적 갈증’을 상징하는 이미지였다. 그래서 “아! 그것은 현해탄이란 바다의 이상한 운명이 아니냐”(「눈물의 해협」)라며, ‘문화적 갈증’에 매혹과 거부를 버무려 노래했다.
  「현해탄」에서 바다는, 근대 지향성 또는 진보 의식의 상징성을 품는다. “아무러기로 청년들이/ 평안이나 행복을 구아혀/ 이 바다 험한 물결 위에 올랐겠는가?”에서 바다는, 실존의 바다요, 역사의 바다로 그 포괄성을 지닌다. 희망과 좌절, 오기와 열등감, 용기와 두려움, 도전과 좌절, 믿음과 배신, 기쁨과 슬픔, 이상과 현실, 삶과 죽음이라는 모순 내지는 이율배반이 교차하는 격심한 갈등의 상징으로 인식된다.

  정지용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포탄으로 뚫은 듯 둥그란 선창으로/ 눈섶까지 부불어 오른 수령이 엿보고// 하늘이 함폭 나려 앉어/ 큰악한 암탉처럼 품고 있다” (정지용, 「해협」 부분)에서 시적 주체는, ‘창’ 넘어 바다와 하늘의 풍경을 바라본다. 창은 외부 세계 내면의 통로다. 창을 통해 외부 세계를 관찰하고, 외부 세계가 지닌 진리를 수용한다. 개방적 심리에 기댄 개방적 구조를 지녔다. 그에게 있어 바다는, 고통스러운 여행의 과정이라기보다는 밝은 미래를 기약하게 해주는 신지식과 신문명의 세계로 연결되는 통로로 기능한 것이다.

  김종삼에게서 바다는, 민족 분단의 비극적 상징으로 나타난다. “1947년 봄/ 심야/ 황해도 해주의 바다/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당포//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틴 곳./ 스무 몇 해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 (「민간인(民間人)」, 전문).
  생사를 걸고 월남하던 중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인 용당포에서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 영아는, 일행의 안전을 위해 바닷물에 던져진다. 해방공간의 비극적 분단사가 소스라치게 생생하다. 품 안의 젖먹이를 익사시켜야 하는 어미의 비통함을 누가 다 헤아릴 수 있을까. 그래서 바다는, 생명의 원천이자 영원이다. 그리고 ‘죽음과 재생’, ‘창조와 소멸’, ‘시초와 종말’이다.

  실은 “바다”의 장단 구조를 말하려고 했는데, 막상 쓰다가 보니 장단 구조에 대해 말하기가 좀 ‘거시기’하다. 그래도 밀고 가자.
  『훈민정음 해례본』 등 15세기 문헌에서는, 첫음절 ‘바’가 평성으로 단음이고, ‘다’가 측성으로 장음이다. 이런 ‘단+장’ 구조에선 평고조 현상이 나타나므로 ‘극단+장’의 구조로 바뀐다. 따라서 [바다ˑ〔󰁔󰁟〕]처럼 발음된다. 아주 짧은소리와 긴소리로 구성된 낱말이다. 바다는 물이 작은 샘에서 내를 지나 강을 거쳐 너르디너른 곳에 가닿기 때문일까.

  오늘이 바다의 날이라니, 무턱대고 두서없이 주저리주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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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url.kr/r4ahw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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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말의 뉘앙스] ― ‘첫째와 첫 번째’

   예전엔 책을 주로 보고, 논문을 간간이 봤다면, 요즘엔 책보다는 논문을 더 자주 보는 편이다. 책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논문에서 이유와 근거를 여럿 제시할 때, ‘첫 번째, 두 번째…’라고 잘못 쓰는 걸 무척 자주 본다. 명토 박아 말하지만, 이럴 땐 당연히 ‘첫째, 둘째…’라고 써야 한다. 영어에선 ‘첫째와 첫 번째’의 구분 따윈 없다. 그저 단순하게 ‘first’ 하나로만 쓴다. 그러나 우리말에선, ‘첫째/첫 번째’의 쓰임이 서로 다르다. 그 뉘앙스가 달라도 팔팔결 다르다.

   그럼 ‘첫째/둘째/셋째…’는, 어떨 때 쓰이는가. 간단하다. ‘공시적(共時的)’일 때 쓰인다.
   첫째,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근거나 이유를 나열할 때 쓰인다.
   둘째, “첫째 칸, 둘째 칸”처럼 열차의 몇째 칸을 지시할 때 쓰인다. 이때 ‘첫 번째 칸, 두 번째 칸’은 틀린 말이다. 2020년 3월 31일 자 <뉴스웍스>의 기사에, 당시 미래통합당의 비례대표 위성 정당인 미래한국당 원유철 대표가 이렇게 말한 게 실렸다. “미래 열차 ‘두 번째 칸’을 선택해주고 탑승해 달라”고. 이는 “미래 열차 ‘둘째 칸’을 선택해주고 탑승해 달라”고 해야 맞는 말이다. 이걸 써준 보좌관도, 또 그걸 그대로 읽은 원유철 의원님도, 그리고 오류를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기사를 쓴 기자도 다 놓쳐 버린 것이다. ‘공시적(共時的)’일 땐, ‘둘째’지 ‘두 번째’가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 아랍처럼 남편 하나에 여러 부인을 두는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에서 “첫째 부인, 둘째 부인, 셋째 부인”이라고 해야 한다. ‘일처다부제(一妻多夫制)’도 마찬가지다. “첫째 남편, 둘째 남편, 셋째 남편”이라 한다. 아름다운 사례는 아니지만, 바람둥이가 동시에 여러 애인을 만나는 경우도 그러하다. “첫째 애인, 둘째 애인, 셋째 애인”이라고 한다. 이 역시 ‘공시적(共時的)’이다.

   다음으로 “첫 번째/두 번째/세 번째”는, 어떤 경우에 쓰이는가. 간단하다. ‘통시적(通時的)’일 때 쓰는 말이다.
   첫째,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에서 사별하고 재혼한 배우자는, ‘두 번째 부인/두 번째 남편’이 된다. 만일 재혼해 얻은 부인이 ‘둘째 부인’이 되려면, 죽은 부인이 살아 돌아와 함께 살 때만 가능하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는,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첫 번째/두 번째’는, 어떤 동일한 성격의 일이 끝나고, 새롭게 시작될 때 쓰이는 ‘통시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둘째, 어떤 행사에서 입장식의 리허설을 여러 번 할 때가 있다. 이럴 경우는 ‘첫 번째/두 번째’다. 그러나 실제 본 행사에서 입장하는 순번이 아홉째라면, “‘아홉째’로 입장하는 충청도 선수단입니다”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아홉 번째’로 입장하는 충청도 선수단입니다”라고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오류다. 왜냐하면 “아홉 번째로 입장한다”는 것은, 여덟 번을 입장하고 나서 아홉 번째 다시 입장할 때 쓸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리허설이 아닌, 실제의 본행사에선 이런 경우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잘못 쓰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정확한 우리말이 어느결에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자주 쓰다 보면 익숙해지리라.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뀔 때 처음에나 낯설었지, 이내 익숙해지지 않았는가. 이는 특히 우리말의 교과서인 아나운서들께서 더욱 잘 가려 쓰신다면, 아주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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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url.kr/jxfln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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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을 위하여] ― ‘말의 가락’

  □ 서민을 가격(加擊)하는 소주 가격(價格) 인상

  서민이 부담 없이 마시던 술. 소주 가격이 올랐고, 또 오르며, 그리고 오를 전망이란다.

  ‘가격(加擊)’은, “손이나 주먹 그리고 몽둥이 따위로 때리거나 침”이라는 뜻이다. ‘더 할 가(加)’는 평성으로 단음이고, ‘칠 격(擊)’은 ‘측성(仄聲)’에 속하는 ‘입성(入聲)’으로 촉급한 소리다.

  이 ‘가격(價格)’의 장단 구조는, ‘평+측’ 구조다. 이런 평측 구조에선 뭔가 변화가 일어난다. 측성 앞에서 평성은, 아연 놀란 듯 그 소리의 길이가 더욱 짧아지며, 높아진다. 이를 ‘평고조(平高調)’ 현상이라 한다. 이 현상은, 어떤 경우에도 일어나는 규칙과도 같다. 측성 앞에서 평성이 고조되는 현상은, 보편성을 띤다. 달리 말하면 ‘단+장’의 구조에서 ‘단’이 극단음으로 발화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전에서처럼 [가격]이라고 두 음절 모두 단음으로만 발화하라는 건, 한국어가 모국어인 한국어 사용자가 발음하는 것과는 팔팔결 다르다. [가격]은, 현실에서의 실제 발음이 아니다. 위에서 말했듯 ‘가(加)’의 소리 길이가 가장 짧게 발음되는 ‘극단음(極短音)’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문장이 만일 “가격”으로 끝난다면, ‘극단+단’의 길이가 된다. 왜냐하면 촉급한 소리라는 입성으로서의 ‘격’의 받침 ‘ㄱ’은, 폐쇄음이므로 발화하자마자 닫쳐 버리기 때문이다. 입성은 촉급한 소리지만, 측성에 속한다. 측성엔 ‘상성·거성·입성’이 있다. 이 측성 앞에서의 평성(=단음)은 언제나, 늘 변함없이 평고조된다.

  문자란, “구어(口語)의 의사소통 체계를 지시하는 표지며, ‘Writing’과 ‘letter’의 통합체로서 인간의 언어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장음이라든지, 강세와 고조 등의 기호로 청각을 시각화해주어야 한다. 여러 나라의 사전이 그러하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발음 사전’에도 여러 기호를 사용한다. 그러나 모든 소리를 표현하는 기호가 더욱 다양해져야 한다.

  그런데 “가격“에서와 “가격하는”에서의 ‘격’의 소리는 달라진다. 우리말에서 음절의 길이는 고정되지 않고, 변화한다. 그 변화를 담아내야 비로소 말하듯 하는 낭독이 가능해진다. 우리말은 교착어이기 때문이다. 조사나 어미 등이 없는 고립어로서의 중국어와 달리 고정되지 않은 특징이 있다. 우리말은 우리말의 특징에 따라 발화해야 우리말다워진다. 간단한 이치 아닌가.

  “가격”의 첫음절 '가'는 극단음이고, 둘째 음절 ‘격’은 촉급한 소리이므로 두 음절 모두 짧디짧은 소리로 ‘극단+단’으로 발음된다. 그러나 “가격하는”에서는, ‘극단+장+단+장’의 구조가 되어 둘째 음절 ‘격’이 장음화된다. 이때의 장음은 보통의 장음처럼 장모음이 아니라, 장자음이다. ‘장모음’은 한 음절에서 모음의 길이가 길어지는 것이고, ‘장자음’은 자음의 길이가 길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실은, 소리 없는 ‘묵음의 길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하는”의 장단 구조는, ‘단+장’이다. 따라서 ‘하’는 더욱 짧아지고, ‘는’은 장음의 제 성질대로 길게 발음된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하’는 무점이고, ‘는’은 방점을 찍어 놓았다. 방점은 장음 표시다. 그래서 “가격하다”는 [디땅:디땅:]의 느낌으로 발화하면 마침맞을 것이다. 혹은 ‘가’를 16분음표, ‘격’을 4분음표, ‘하’를 16분음표, ‘다’를 8분음표쯤으로 발화한다면, 실제의 모국어와 가장 가까운 발음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글로써만 이를 다 표현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말의 고저장단 앞에서 나는 늘 무력할 뿐이다.

  ‘가격(價格)’은 [가ː격]으로 '가'가 길게 발음된다. ‘값 가(價)’는 거성으로 장음이기 때문이다. 사전에는 [가격]으로 표시됐다. 두 음절 모두 단음으로 읽으라 지시한다. 그러나 ‘값 가(價)’는 거성으로 장음이므로 길게 읽어야 한다. 사전의 오류다.

“소주의 가격 인상으로 가격당하는 서민”을 ‘가격(加擊)’과 ‘가격(價格)’의 제 음의 장단에 맞게 발음해보자. 특별히 아나운서·성우·배우 지망생들에게는, 혹여 다소라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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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가의 소소한 단상] ―‘한미(韓美)와 한국(韓國)'

  이게 대체 말이나 되는 일인가~?!
  제 나라 국민이 제 나라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나 되느냐 말이다.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운 일이다.

  요즘 뉴스에서 “한미동맹”이란 말이 자주 등장한다. “한미(韓美)”를 [한:미]로 발음하는 아나운서가 많다. “한미”의 첫음절 ‘한(韓)’을 장음으로 발음하다니...?! 우리말은, 한자의 상성과 거성을 장음으로, 그리고 평성을 단음으로 발음한다. 이 말의 규칙은, 여느 규칙과 달리 예외가 없는 사회적 약속이다. 그러니까 ‘한(韓)’이 상성이나 거성이어야 장음이 될 수 있다. 그런데 ‘한(韓)’은 평성으로 단음이다. 긴 건 길게, 짧은 건 짧게 읽으면 그만인 아주 간단한 문제 아닌가. 내 귀가 다 의심스러워 몇 번이고 다시 들어봤다. ‘한(韓)’을 단음으로 발음하는 아나운서가 아예 없진 않다.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한(韓)’은 평성으로 단음이고, ‘미(美)’는 상성으로 장음이다. 그런데 아나운서 대부분이 ‘한(韓)’을 장음으로, ‘미(美)’는 또 단음으로 발음한다. 뒤집혔다.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운 일이다. 영어가 강세 언어고, 중국어와 일본어가 고조 언어라면 한국어는 ‘장단의 언어’다. 장단이야말로 우리말 특성의 고갱이다.

  안타깝지만, 더러 제대로 발음하는 아나운서의 발음도 실은, 정확한 발음이라고 할 수 없다.
  ‘장음+단음’의 구조에서는, 있는 그대로 첫음절을 길게, 둘째 음절을 짧게 발음하면 된다. 그러나 ‘장음+장음’의 구조에서는, 다르다. 첫음절만 장음으로 발음되고, 둘째 음절은 단음화된다. 따라서 첫음절은 길게, 둘째 음절은 짧게 발음한다. 이 역시 예외 없는 규칙이고, 사회적 약속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한미(韓美)”처럼 ‘단음+장음’의 구조에선, 묘한 일이 벌어진다. 이 역시 피할 수 없는 규칙이다. 이런 경우엔, 첫음절의 단음이 돌연 긴장이라도 하듯 아연, 단음이 더 짧아지며 동시에 높아진다. 그리고 둘째 음절의 장음은 그대로 유지된다. 이를 일러 ‘평고조(平高調)’ 현상이라고 한다. 따라서 “한미(韓美)”는 첫음절을 극단음(極短音)으로 둘째 음절을 장음 발음해야 한다. 한 가지 첨부하자면, 장음은 높은음이라지만, 낮은 데에서 올라가는 소리다. 이런 면까지 고려해서 듣는다면, 불행하게도 정확하게 발음하는 아나운서는 없었다.

  “한국(韓國)"을 [한:국]으로 ‘한’을 아주 길게 발음할 뿐 아니라, '국'까지 길게 발음하기도 한다. ‘국’의 종성 받침은, 폐쇄음이다. 입성이라고 해서 아주 촉급한 소리다. 발화되자마자 내파되고 마는 아주 짧은소리다. 이 촉급한 입성을 중성 모음 [ㅜ]를 길게 발음하는 것이다. 거꾸러 선 것이다. 만일 '국' 뒤에 조사가 붙는 경우엔 길어질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리 없는 '묵음'의 구간이 생긴 것이다. 저처럼 입성을 읽으며 중성 모음을 장음화하는 것은, 뒤집힌 일이다. 제 나라 국민이 제 나라 국명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운 일이다. 게다가 국민의 교과서가 되어야 할 아나운서님들께서 말이다.

사실 이런 일은, 아나운서의 잘못이 아니다. 잘못이라면, 『표준 한국어 발음 사전』(全英雨)과 『표준 한국어 발음 대사전』(KBS)에 "한국"을 [한:국]로 해놓은 것이 잘못이고, 또 그를 그대로 베껴 쓴 여러 한국어 사전이 문제일 것이다. 발음사전 편찬자들은, 뒤늦게라도 오류를 수정해야 할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일본이 편찬한 『총독부 사전』에는, [한국]으로 돼 있다. 짜장,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부끄럽다.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뿐이다.

  하지만 이는 ‘옥에 티’일 뿐일 것이라 믿는다.
  늘 살아있는 국민의 발음 교과서로서의 아나운서님들을 언제나 응원한다.


출처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pfbid0n7cJZDp4eqohzPhTCgf8DY6VBRFw3RK33kqybj17CwHugnfQBHfeLhJ8yrwyHvd8l&id=100054589251893&mibextid=Nif5oz

 

Posted by 시요정_니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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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가의 소소한 단상] ― ‘유치원(幼稚園)의 장·단’

   ■ 아름답구나, 우리말 가락

   아침에 눈 떠보니 비가 내린다. 입하를 앞두고 만물을 소생케 할 곡우의 비가 내린다. 기후환경이 변했다 해도 절기는 여태 어김없다. 이제 봄을 배웅하고, 여름을 마중 나갈 채비를 할 때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저 연두의 어린것들이 그저 맑게 자라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새싹들이 다니는 유치원의 교육을 둘러싸고 다시 시끄럽다. 방송에선 “유치원”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우리말의 장단 가락을 갈라보자.

   “유치원(幼稚園)”의 첫음절 ‘어릴 유(幼)’는, 조금 유별나다. 성 전환을 했기 때문이다. 원래 사성에서 장음인 거성이었는데, 평성으로 변한 몇몇 음절 중 하나가 유(幼)다. 지금도 『한한대자전』에는, 여전히 거성으로 표기돼 있지만, 이미 평성으로 성(聲) 전환된 음절이다. 그러니까 단음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젠 평성으로서의 단음이다. 그러므로 짧게 발음해야 한다.

   유치원의 둘째 음절 ‘어릴 치(稚)’는, 거성으로 장음이다. ‘치’는 성(聲)의 변화 없이 원래의 제 성(聲) 그대로 거성이다. 따라서 “유치”는, ‘단+장’ 구조다. 이현복 서울대 언어학 교수는, 말의 길이를 쉽게 이해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단+장’을 “디땅”이라고 구음을 붙이고, 반대로 ‘장+단’을 “땅디”라 했는데, 우리에게 소리의 길이를 좀 더 쉬이 느껴지게 한다. 아주 간단하면서도 유용한 방법이다.

   유치원의 셋째 음절 ‘원(園)’은, 평성으로 단음이다. 세 음절을 모두 합치면 ‘단+장+단’의 구조다. “디땅디~”. 그러므로 [유치ː원]으로 발음된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단장의 구조에서는, 앞의 단음절이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 마치 장대높이뛰기 선수가 높은 바를 넘으려고 장대를 바닥에 꽂고 튀어 올라 넘어가려고 하듯 돌연 긴장, 아연 소리가 더 짧아지며 높아진다. 그래서 ‘극단+장+단’의 구조로 바뀐다. 기계음이 아닌 한 여기서 첫음절의 단음 ‘유(幼)’가 별안간 더 짧아지고 높아지는 극단음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우리말의 오묘한 변화무쌍이라니~! 여기서 우리말은 노래에 가닿을 수 있으리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첫음절 ‘유(幼)는 ‘반의반박자(=16분음표)’, 둘째 음절 ‘치(稚)는’ ‘한박자(=4분음표)’, 셋째 음절 ‘원(園)’은 ‘반박자(=8분음표)’쯤으로 발화된다. (페북의 글쓰기 환경이 기호를 넣을 수 없어 아쉽다. 혹시 그게 가능한진 모르겠다.)

  여기쯤 읽었을 때 혼자 자그마한 목소리로 “디땅디~”의 가락으로 [유치:원]하고, 발음해보신 분들도 있으리라. 앗~, 그러셨다고요?! “좋아요, 좋아~!” 그런데 뭔가 좀 어색하고 잘 안되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거기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이렇게 단음이 더 짧게 발음될 때는, 한 가지 고려할 사항이 있다. 발화의 시점을 늦춰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못갖춘마디(an incomplete bar)’처럼 말이다. 그랬을 때 정확하고, 명징하고, 마침맞은 발음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을 목소리 좋은 분들이 이렇게 발음한다면, 얼마나 멋질까. 생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마치 기계음과 같이 우리말 가락을 죽여놓은 한국어 사전의 "단단단" 가락의 [유치원]은, 수정돼야 한다.

   눈치빠른 이들은 벌써 알아채리거나 질문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럼 장음의 발화 시점이 조금 이른 것인가?” 오호, 맞다. 마치 꾸밈음(Ornaments)의 발화처럼 조금 아주 살짝 조금 먼저 발화가 시작된다. 장고의 채편을 두드릴리 때 ‘따’가 있고, 딱이 있는데 이를 한번에 치는 걸 ‘끼닥’이라고 한다. 바로 저 ‘끼’가 꾸밈음이다. 장음의 발음이 그러하다.

   한 번 ‘눈(雪)[눈:]’ 하고 꾸밈음의 발화로 말해보고 나서, 못갖춘마디의 “디땅디” 리듬으로 [유치:원]을 발화해 보면, [눈:]과 [유]의 장단음에서 그 발화의 시점 차이를 바로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도 아름답구나, 우리말의 가락~! 곡우비 맞고 푸르게 피어나는 연두빛으로...

  “봄맞이 나온 유치원 아이들/ 조막막한 손으로 꽃잎을 어루만지니/ 꽃 다 심고 쉬는 할머니들/ 아이들 보며 벙그레해져선// 「아이구, 여기도 봄꽃이 한 무리네」” (장맹순, 「봄꽃」, 5연 1~2행.)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안도현, <바닷가 우체국>, 16~17행.)


출처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pfbid0TehGmrt54SXj8DQCaH9YE8znjCKmfZhM11fVYurLEWTrbpStagJa1aFCbpgac19cl&id=100054589251893&mibextid=Nif5oz

 

Posted by 시요정_니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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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발음, 종성 첨가 현상’

■ 한국어 사전을 넘어, 한국어 교재를 넘어서...

   글을 낭독하거나 시를 낭송하다 보면, 한국인의 실제 발화가 한국어 교재나 표준발음법과 서로 다를 때가 있다. 처음엔 고민스러웠지만, 전자를 택한다. 한국어 교재나 한국어 사전엔 공식적으로 반영되지 않았지만, 우리말엔 분명 ‘종성 첨가 현상’이 있다.

   표준발음법에선 “기차(汽車)”를 [기차]로 발음하라 지시하지만, 정작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한국인은, [기차]를 [긷차]로 발음한다. 요즘은 외국인도 흔히 쓴다는 “오빠”도 [오빠]가 아니라 [옵빠]로, 강아지 다음 서열인 “아빠”도 [아빠]가 아니라 [압빠]로, 김혜수가 찍은 영화 “타짜”도 [타짜]가 아니라 [탇짜]로, 아이들이 좋아하는 코코아도 [콕코아]로 발음한다. 최혜화(2020)의 ‘음성 프로그램’의 실험 결과도 그러하다.

   모음과 모음 사이 자음의 경음·격음 앞의 발음에서 종성이 첨가된다. 이제 이 말을 좀 풀어보자. 그러니까 “오빠[ㅇ/ㅗ/ㅃ/ㅏ]의 초성 모음 ‘ㅗ’와 종성 모음 ‘ㅏ’사이에 중성 경음으로서 자음 [ㅃ]이 있을 때, 그럴 때 “오” 음절에 종성 받침 [ㅂ]이 첨가돼 “오빠”가 [옵빠]로 발화된다는 것이다.

   한국어 음절 구조는, 초성·중성·종성으로 구분된다. “밤[ㅂ/ㅏ/ㅁ]”은 초성 자음 ‘ㅂ’, 중성 모음 ‘ㅏ’, 받침으로 쓰인 종성 자음 ‘ㅁ’으로 나뉜다. 한국어의 특징이 이러해서 외국인은, 한국어 종성 발음에 어려움을 겪는다. 만일 그대가 외국인이라면 이 ‘종성 첨가 현상’을 이해하고 노력할 때, 한국인과 같이 자연스러운 한국어를 넉넉히 구사할 수 있다.
   물론 한국인이라도 더욱 더 자연스러운 발화가 가능해질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처럼 ‘아는 만큼 들린다’. 들려야 비로소 익힐 수 있다. 대중에게 자주 노출되는 앵커ㆍ성우ㆍ배우가 더욱 정확한 발음을 구사한다면, 그 덕이 넘쳐 우리 모두에게 혜택을 줄 것이다. ‘종성 첨가 현상’에 대한 예를 몇 가지 든다. 앞엣것이 실제 발화다.

   “눈물이 나면 긷차[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정호승, <선암사>, 1연 1행).

   “긷차[기차]는 예서 떠났다/ 어리석었던 황제의 뒤늦은 밀서 한 장 든/ 이준과 이상설을 태우고” (채광석,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에서>, 1연).

   “우리 옵빠[오빠] 화로” (임화, <우리 오빠 화로>, 제목).

   “아버지도 아니고 옵빠[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문정희, <남편>, 1연 1~2행).

   “압빠[아빠]는 아픈 가슴에서 그리움의 면발을 뽑아” (정호승,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3연 4행).

   “엄마도 [압빠]아빠도 없이/ 온종일 살구꽃으로 흩날린” (육근상, <만개>, 3연 1~2행).

   “너는 지금 콕코아[코코아] 한 잔을 바라보고 있어” (배수연, <코코아>, 1연).

   한국어 교재와 표준발음법이 바뀌어 '학교의 지식'이 되기 전에라도 우리는 실제의 발음으로 고고~!^^*

출처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pfbid02u7S5b7WR3MgJM7UZJG2uqCGLSoLRVRJskyyqkcxa6pzvzG7xgWGZUutfRfqcibRjl&id=100054589251893&mibextid=Nif5oz

 

Posted by 시요정_니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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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장단의 특별한 예외 한 가지]

  일반적으로 “나는”을 [나는]으로 발음한다. 그러나 “나는”은, [나ː는]으로 일인칭 대명사 ‘나’를 장음으로 발음해야 한다. 그리고 보조사 ‘는’은, 단음으로 발음한다. 그러니까 “나는”을 구음으로 말하면, “땅디”의 느낌으로 발화한다. 그 길이를 구체적으로 말하면, “땅(=나)”을 ‘1분음표’, “디(=는)”를 ‘8분음표’쯤으로 읽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우리말 고저장단의 규칙에서 아주 드문 예외적 사례다. 왜 그럴까.

  일인칭 대명사 “나”는, 실은 장음이 아니다. 평성으로 단음인 것이다. 그리고 보조사 ‘은/는’은 ‘측성성 조사’로 장음이다. 그러므로 “나는”은, ‘단+장’의 구조다. 이 말은 [나는ː]으로 읽어야 하지만, 우리 문법에서는 둘째 음절의 장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저 [나는]으로 발음한다.
  그러나 현실의 생생한 언어에서, 단음은 장음 앞에서 돌연 더 짧아지고 높아지는 평고조 현상이 나타난다. 따라서 ‘단+장’의 구조에서는, 앞 음절 ‘나’를 더욱 짧게 극단음으로 발음하고, 둘째 음절의 장음은 그 음가 그대로 길게 발음하는 것이 한국인의 실제 발음이다. 이 규칙에는 거의 예외가 없다. 그러나

  그런데, 단 한 가지. 오로지 "나는"과 "나를"에서는 달라진다. ‘나’ 뒤에 놓이는 보조사 ‘는’과 '나' 뒤에 목적격 조사 ‘를’의 경우는 예외다. 손종섭(2016, p158)에 따르면, 이때 단음 ‘나’가 장음화된다. 따라서 “나는”은 ‘장+장’의 구조가 된다. 장장의 구조에선 첫음절의 장음만 장음으로 발음되고, 둘째 음절의 장음은 단음화 되기 때문에 결국에는 ‘장+단’의 구조가 되어 “나는”은 [나ː는]으로, “나를”은 [나ː를]이 된다는 것이다. 오로지 ‘나(我)’에 보조사 ‘는’과 목적격 조사 ‘를’이 결합하는 경우에만 그러하다. 그외의 조사는 해당되지 않는다.

  한 가지 더. 장음은 길게만 읽는 것이 아니다. 장음은 낮은 소리다. 낮은 건 묵직한 것이다. 낮다고 약한 건 아니다. 낮다는 건 ‘높낮이’다. 강약의 세기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단음 또한 짧고 동시에 높은 소리다. 높은 건 가벼운 것이다. 말의 성질과 특징에 따라 발음하면 된다. 낭송이라고 해서 특별한 게 없다. 있는 그대로, 생긴 그대로 그 성질과 특징 그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간혹 이렇게 예외는 있다.

   '장+단(=땅디)' 구조로 읽어보자. 문장 전체의 통사적 운율이 살아날 수 있다.

   "나는 이제 떠난다."
   "나를 떠나지 마오."
   "나는 갔다."

Posted by 시요정_니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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