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단상] ― ‘사전이 놓친 우리말 장단’

    톱.
    톱은, 나무나 쇠붙이 따위를 자르거나 켜는 데 쓰는 연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톱을 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톱의 발음을 정확하게 하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일반적 국어사전은 물론 『한국어발음사전』에서까지 “톱”의 장단이 잘못 기재됐기 때문입니다. 사전에 톱을 단음으로 표기해 놓았습니다. “톱”은, “별(星)/벌(蜂)/돈(錢)/돌(石)/실(絲)” 등등과 같이 15세기부터 장음으로 구분해 왔습니다. 손종섭(2016)은, 오늘날에도 “톱”이 장음으로 발음된다고 합니다. 한자의 ‘톱 거(鋸)’ 역시 거성(去聲)으로 장음입니다.

   음의 길이인 음장(音長)에는 기본적 규칙이 있습니다. 당연한 말입니다만, ‘장음+단음’은 ‘장+단’으로 읽습니다. 그런데 ‘장음+장음’은 ‘장+장’으로 읽히지 않고, ‘장+단’으로 발음됩니다. 장음 뒤의 장음이 놓일 경우, 첫음절의 장음만 장음으로 실현되고, 둘째 장음은 단음화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기본 규칙이 있습니다. 단음은 장음 앞에서 더 짧아지는 ‘극단음(極短音)’이 됩니다. 이 소리가 우리말에서 가장 짧습니다. 이렇게 장음 앞에서 단음이 더욱 더 짧아지는 것을 평고조(平高調) 현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말은 고정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변화무쌍합니다.

   우리말에는 ‘평성성/측성성’ 조사가 있습니다. 측성성 조사, 그러니까 장음으로 분류되는 조사 몇 가지만 예를 들면, ‘은/는/이/가/와/과/도/만/처럼’과 같은 조사가 있습니다. 모두 길게 발음되는 소리입니다. ‘처럼’은 첫음절만 장음입니다.

   “톱”이 15세기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장음으로 읽히는 소리라면, 장음으로 발음되는 저 측성성 조사가 단음으로 발음됩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 장음 뒤의 음절은 단음화되기 때문입니다. “톱은”은, 둘 다 장음이므로 ‘장+장’의 음장 구조이나, ‘장+단’의 구조로 바뀝니다. 첫음절의 장음만 장음으로 실현되고 둘째 음절은 단음화되기 때문입니다.

   사전에서처럼 톱이 단음이라면, “톱은”은 ‘단+장’구조가 됩니다. 단음은 장음 앞에서 ‘극단음’이 되므로 음장의 구조는 ‘극단음+장음’으로 변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리 발화하지 않습니다. [토븐ː]처럼 ‘토’를 극단음으로, 아주 짧게, ‘븐’을 장음으로 발음하지 않습니다. 현실의 발음에서는, [토ː븐]처럼 발음됩니다. “톱은” 뿐 아니라, “톱이/톱과/톱도/톱만/톱처럼”은 모두 장음인 ‘톱을 길게’, 역시 장음이지만, ‘단음화된 조사를 짧게’ 발음합니다. 사전편찬자들이 이 과정을 거쳐 장단음을 새롭게 써야 합니다. 말을 할 때는 모르겠지만, 글을 읽을 때는 우리말의 고저장단을 실현하기 어렵고 그렇다면 말하듯 낭독한다거나 낭송하는 것 역시 불가능합니다.

   우리말의 변화무쌍은, 쉽진 않지만 그런 만큼 이를 구현할 때, 그 가락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을 상상해도 그 이상입니다. 말하듯 낭독/낭송한다는 것은 매력적이고, 노래하듯 낭독/낭송한다는 것은 매혹적입니다.

   한국어 사전은 존중되고, 늘 가까이 두고 보아야 하지만, 오류까지 받아들여서는 곤란합니다. 말의 장단은 무척 보수적입니다. 속도를 중시하는 근대 이후 말은, 분명 빨라졌습니다. 말이 빨라졌다고, 장음이 단음으로 바뀐 것은 아닙니다. 물론 더러 바뀐 말도 있습니다. 단음이 장음으로, 또는 장음이 단음으로 바뀐 목록이 있습니다. 장단은, 저와 같이 ‘장단(또는 평측)의 대비’로 장단을 넉넉히 구분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우리말 가락을 더욱 아름답게 할 책무는, '아나운서/성우/배우'입니다. 그런데 장단의 오류가 가장 도드라지는 장르는, 무엇보다도 시낭송이므로 시낭송가가 가장 목마른 이들이 되겠습니다. 에드워드 히르시의 말마따나 "시는 노래와 말 사이를 거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pfbid0n8XXS4jdZDDpQekhPDpzwYWo2SJ6wVbSdXgTDXSKt4hXM4grX7YYAapGPPfackk4l&id=100054589251893&sfnsn=mo&mibextid=RUbZ1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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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험詩] ― ‘omnibus 혹은 혼합의 연형(連形)시조’

   오는 8월 5일(토) 오후 4시, ‘경서재 시낭송 잔치’에서 윤금초 시인의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를 낭송합니다. 특별히 ‘재춘 제주도민’께서 오셔서 함께 즐기신다면 더욱 좋을 듯합니다.

   지난봄, 이중섭 화가의 회화와 백석 시의 상호텍스트성에 관한 논문을 찾다가 우연하게도 김보람(2020)이 쓴 윤금초 시인 논문 한 편을 발견했습니다. 거기서 저 시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를 만났습니다. 뜻밖의 선물입니다. 이시는, 이청준 소설 『이어도』가 모티프가 돼 쓰인 시입니다. 제주도 구전 설화 ‘이어도’ 전설이 시의 원형인 것입니다. ‘이어도’는 제주 사람의 이상향이자, 고된 현실을 견뎌내게 하는 도피처이기도 하지요.

   윤금초 시인의 실험 정신에 순도 높은 기립박수를 보냅니다. 그는 한 편의 ‘연작(連作)시조’ 속에 다양한 형태의 시조를 혼합하는 ‘옴니버스’ 시조, 다시 말해 ‘혼합적 연형(連形)시조’를 넉넉히 건져 올렸습니다.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는, 이청준 소설의 인용문 한 연과 7수의 다양한 시조를 버무려놓은 옴니버스 시조로 8연으로 구성됐습니다. 1수/4수/6수는 ‘평시조’, 2수는 ‘양장시조’, 3수는 ‘엇시조’, 5수/7수는 ‘사설시조’로 모두 일곱 수의 연시조입니다. 윤금초에 주목할 점 하나는, 시조의 생명인 종장의 율격을 철저히 지키면서도 그 정형에 구속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정형이라는 틀 안에서의 자유를 향한 그 힘은, 단조롭고 틀에 박힌 정형의 운율을 훌쩍 뛰어넘는 서사 구조를 창출해 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시의 내용이 형식을 지배한다는 좀 더 적극적인 리듬 의식을 펼칩니다. 그러니까 정형시의 운율과 현대시의 리듬으로서의 프로조디를 버무려 놓았다는 점입니다. 그의 실험 정신은 무엇을 상상해도 그 이상입니다.

   ‘이어도/어어도 사나/이어 이어’와 같은 반복구가 주술처럼 반복됩니다. 또 ‘~속에/~하며/~넘어’ 그리고 ‘~오고 ~가고/~들면 ~때면’의 반복적 혹은 대칭적 병렬구조는, 핵심 시어에 반복되는 소리가 그 의미를 증폭케 하는 리듬을 만들어냈습니다. “섬”이라는 핵심 시어 또한 모두 다섯 번에 걸쳐 반복/변주되며 의미를 만들어낼 뿐 아니라, 의미의 확산을 생성합니다. 닿소리의 비음 ‘ㅇ’은, 소리의 반복이 주는 지속성으로 정서적 고양을 이끌며 시의 진폭을 무한 확장하는 역할은 놀랍습니다. 이 시의 리듬에서 김홍도의 「씨름도」를 연상하는 것은, 나의 무리한 상상력이겠지만, 「씨름도」의 좌측 하단의 여백은, 마치 그림의 닫힌 공간을 무한하게 열어 낸 김홍도의 천재적 솜씨와 같다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다음은, 윤금초의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전문입니다.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 윤금초

   긴긴 세월 동안 섬은 늘 거기 있어 왔다. 그러나 섬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섬을 본 사람은 모두 섬으로 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다시 섬을 떠나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청준 소설 ‘이어도’에서

   지느러미 나풀거리는 기력 풋풋한 아침 바당
   고기비늘 황금 알갱이 노역의 등짐 부려놓고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퉁방울눈 돌하루방 눈빛 저리 삼삼하고
   꽃멀미 질퍽한 그곳 가멸진 유채꽃 한나절.

   바람 불면 바람소리 속에 바당 울면 바당 울음 속에
   웅웅웅 신음 같은, 한숨 같은 노랫가락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아련히 바닷바람에 실려 오고 실려 가고.

   다금바리 오분재기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상한 그물 손질하며
   급한 물길 물질하며
   산호초 꽃덤불 넘어,
   캄캄한 침묵 수렁을 넘어.

   자갈밭 그물코 새로 그 옛날 바닷바람 솨솨 지나가네.
   천리 남쪽 바당 밖에 꿈처럼 생시처럼 허옇게 솟은 피안의 섬 제주 어부 노래로 노래로 굴려온 세월 전설의 섬 가본 사람 아무도 없이 눈에 밟히는 수수께끼 섬, 고된 이승 접고 나면 저승 복락 누리는 섬, 한번 보면 이내 가서 오지 않는 영영 다시 오지 않는 섬이어라.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밀물 들면 수면 아래 뉘엿이 가라앉고
   썰물 때면 건듯 솟아 푸른 허우대 드러내는
   방어빛 파도 헤치며 두둥실 뜨는 섬이어라.

   마른 낙엽 몰고 가는 마파람 쌀쌀한 그해 겨울
   모슬포 바위 벼랑 울타리 없는 서역 천축 머나 먼 길 아기작 걸음 비비닥질 수라의 바당 헤쳐 갈 때 물 이랑 뒤척이며 꿈결에 떠오른 이어도 이어도, 수평선 훌쩍 건너 우화등선 넘어가 버리고
   섬 억새 굽은 산등성이 하얗게 물들였네.


출처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pfbid08hRho9VErPn2mFiKWU9vCAf8jq4GRdmFu3Mdhsb3FeYazgsD92Sk2PPcCwnJBZiJl&id=100054589251893&sfnsn=mo&mibextid=RUbZ1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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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이 놓친 장음] ― ‘널 판(版)’

‘장/단음’ 판단 근거는, 실은 아주 간단합니다. ‘고유어’나 ‘우리말 한자어’나 모두 ‘상성·거성’이면 장음이고, 평성이면 단음입니다. 다만 ‘상성·거성’인지, ‘평성’인지를 찾아내는 일이 무척 번거롭고 성가신 일입니다. 게다가 ‘평성화한 상성·거성’까지 있으니, 이를 일일이 밝히는 일은 참으로 귀찮기 짝이 없는 일이긴 합니다.

‘널 판(版)’은 상성(上聲)입니다. 상성은, 거성(去聲)보다 더 긴소리입니다. 그런데 여러 『국어사전』은 물론 『표준한국어발음사전』에까지 장음을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상성이 가장 긴소리인 장음인데, 단음으로 발음하라고 지시합니다. 게다가 이 글자는 ‘평성화된 상성의 목록’에도 오른 바 없습니다. 최한룡은 이를 오류라고 합니다. 저도 이에 동의합니다.

‘나무/금속/돌 등의 판에 그림을 새겨, 그 판에 먹이나 물감으로 채색을 하고 종이나 천 따위에 찍어 낸 그림’을 판화라고 하지요. 사전에 이 “판화(版畫)”를 [판화]라고 단음으로 발음하라고 하지만, [판ː화]처럼 ‘판’을 장음으로 발음해야 합니다. ‘널 판(版)’은 상성이니까요. 둘째 음절 ‘그림 화(畵)’는, 거성으로 역시 장음입니다. 그러나 장음 뒤의 장음은, 단음화되는 원칙에 따라 짧게 발음합니다. 이는, 낭송가뿐 아니라, ‘배우/성우/아나’ 그리고 국어 선생님들께서 사전이 수정되기 전이라도 앞장서야 할 일이 아닌가, 합니다.
‘저작물을 인쇄·발행하는 권리라는 뜻’의 “판권(板權)”도 [판권]이 아니고, [판ː권]처럼 발음해야 합니다. 그리고 판목에 새겨 인쇄한 책이라는 “판본(板本)” 역시 [판본]이 아니라, [판ː본]이라 발음해야 합니다.

그리고 ‘널빤지 판(板)’도 상성입니다. 따라서 "판자(板子)"도 사전이 지시하는 대로 [판자]가 아니라, [판ː자]로 발음해야 하고, "판잣집"도 [판ː잗(자)찝]으로 발음합니다.

한 글자의 오류가 여러 단어의 오류로 이어집니다. 일일이 대조해보아야 할 일입니다.

  [판화] (×) / [판ː화] (0)
  [판권] (×) / [판ː꿘] (0)
  [판본] (×) / [판ː본] (0)
  [판자] (×) / [판ː자] (0)
  [판잣집] (×) / [판ː잗찝] (0)


출처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pfbid0vNRTKUJV9a5KP9AgL4LVDUWWVZNiQudsugdnHr7CWa8ArDCrFFp7VMsBGWZDwN3Al&id=100054589251893&mibextid=Nif5o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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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으로 받은 사진과 문장] ㅡ '리듬 혹은 프로조디'

"흐린 뒤 흰구름은 삶아둔 행주같다."

머리에 쏙 들어오는 문장입니다. 리듬감이 있기 때문이죠. 이 문장은, [ㅎ]이 세 번 반복되며 리듬이 생성됩니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의 반복은, 세 번이 아니라 네 번입니다. 'ㅎ'의 반복은 물론 세 번이지만, '마찰음의 반복'이라는 측면에서는 네 번이 반복되는 겁니다. 반복은 동어반복 뿐 아니라, 유사반복 또는 유음반복에서도 생성된다고 합니다.

[ㅎ]은 마찰음입니다. 그리고 [ㅅ] 역시 마찰음이지요. [ㅎ]은 '후두 마찰음'이고, [ㅅ]은 '치경 마찰음'입니다. "흐린"에서 '흐'의 [ㅎ], "흰 구름'에서 흰의 [ㅎ], "삶아둔'에서 '삶'의 [ㅅ], "행주"에서 '행'의 [ㅎ]. 저 문장은, 이렇게 마찰음이 네 번 반복되며 그 반복이 리듬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리듬으로 직조된 문장은, 전달력 또한 높아집니다. 그리고 리듬과 기억은, 꽤나 긴밀한 관계여서 리듬감 있는 문장이 잘 외워집니다. 그래서 <오디세이아>, <일리아드>가 시로 쓰인 것이겠죠. 시가 곧 노래입니다. 문자 발명 이전까지는, 장편 소설처럼 아주 긴 저 대서사시를 몽땅 암기(=노래)해 후세에게 전해왔던 것입니다.

그리스에서 알파벳이 만들어진 기원전 7세기 이후에는, 암송 능력이 다소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고대와 중세까지 아니 근대까지도 낭독과 낭송 능력은, 실로 대단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엔, 노래마저 자막 없으면 곤란을 겪을 지경이랍니다.

이 선전 문구가 기억이 납니다. "이 소리가 아닙니다. 이 소리도 아닙니다.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이런 카피, 참 오래 갑니다.

출처
https://l8.nu/qF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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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쳐 읽는 시】― ‘<수라>와 <거미의 생에 가 보았는가>’

   김용택의 시 「그 여자네 집」은, 박완서 소설 『그 여자네 집』 도입부에 시 전문이 그대로 실렸다. 이병주 소설가도 소설에 시를 많이 수용하는 편이다. 그의 소설에서 장편 『망향』, 대하 장편 『산하』, 중편 『세우지 않은 비명』에 백석 시 「적막강산」을 버무려 놓았다.
   안수찬 시인은 백석의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에 대한 공감과 비판의 해석을 버무려 12연에 이르는 장시 「갈매나무」라는 시를 썼다. 그리고 김소진은 『갈매나무를 찾아서』라는 소설을 썼는데, 이 소설의 구성 축은 안수찬의 「갈매나무」의 창작과정 그대로라고 한다.

   안도현 시인은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쓰고, 한편 정일근 시인은 「속(續)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환약(幻藥)」를 썼다. 안도현 시인은 또「백석 선생의 마을에 가서」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안수찬, 안도현, 정일근 시인의 시는,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과 겹쳐 읽을 만하다.

   김연수의 장편 『일곱 해의 마지막』은, 시 창작을 접었던 백석이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 1956년에서 1963년까지 7년 동안, 백석의 삶을 따라 전개되는 소설이다.

   “하얀 벽은 스크린이 되어 제일 먼저 여우난골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사는 큰집에 신리 고모의 딸 이녀, 토산 고모의 딸 승녀, 아들 승동이, (중략) 또 잔고기를 잘 잡던 앞니 뻐드러진 주막집 동갑내기 아이 범이와 장꾼들을 따라와 엄지의 젖을 빠는 망아지와 물쿤 개비린내와 가지취 냄새를 펼쳐 보이곤 했다.” (김연수, 『일곱 해의 마지막』, 문학동네, 2020, 177~178면).

   김연수는, 흰 바람벽이 마치 스크린인 양 거기 그리운 존재들이 비친다는 「흰 바람벽이 있어」의 참신한 발상법을 빌려 「여우난곬족」, 「酒幕」, 「오리 망아지 토끼」, 「비」, 「女僧」 등의 내용을 반추한다. 백석 시에 대한 깊은 이해 큰 애정이 80년 세월을 넘어 선배 시인의 시와 후배 소설가의 소설을 엮어 한몸이 되게 했다.

   그리고 백석의 「수라(修羅)」를 패러디한 시가 있다. 고형렬 시인의 「거미의 생에 가 보았는가」가 그것다. 오늘 지인께 이 시를 올리며 낭독까지 해주셨다. 기왕이면 백석의
「수라」와 「거미의 생에 가 보았는가」
를 함께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수라(修羅) / 백석

   거미 새끼 하나 방바닥에 내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느젠가 새끼 거미 쓸려 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 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 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라운 종이에 받아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와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 출처: 백석, 『정본 백석 시집』, 고형진 엮음, 문학동네, 2008, 54면.

   거미의 생에 가 보았는가 / 고형렬

   천신만고 끝에 우리 네 식구는 문지방을 넘었다
   아버지를 잃은 우리는 어떤 방에 들어갔다
   아뜩했다 흐린 백열등 하나 천장 가운데 달랑 걸려 있어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간혹 줄이 흔들렸다

   우리는 등을 쳐다보면서 삿자리를 건너가고 있었다
   건너편에 뜯어진 벽지의 황토가 보였다 우리는 그리로
   건너가고 윙 추억 같은 풍음이 들려왔다
   귓속의 머리카락 같은 대롱에서 바람이 슬픈 소리를 냈다
   모든 것은 이렇게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인간들에게 어떤 시절이 지나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방에 늙은 학생같이 생긴 한 남자가
   검은 책을 보고 있었다 우리는 그 남자의 바로
   책 표지 밑을 지나가고 있었다

   머리를 뒤로 넘긴 것 같은 조금 수척한 남자가 멈칫했다
   앞에 가던 형아가 보였던 모양이다 남자는
   형아를 쓸어서 밖으로 버리고 다시 책을 보기 시작했다
   모친은 그 앞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아들이
   사라진 지점에서 어미는 두리번거리고 서 있었다

   그때 남자가 모친을 쓸어 받아 문을 열고 한데로 버렸다
   먼지처럼 날아갔다 남자는
   뒤따라가는 아우에게 얇은 종이를 갖다 대는 참이었다
   마치 입에 물라는 듯이
   아우는 종이 위에 올라섰다 순간 남자는
   문을 열고 아우를 밖으로 내다 버렸다

   나는 뒤에서 앙 하고 소리치며 울었다 그 울음이
   들릴 리가 만무했지만
   그때 남자가 무언가 골똘한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

   혈육들은 그 후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다
   바람 소리만 그날 밤새도록 어디론가 불어 갔다 어둠 속
   삿자리 밑에서 나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알 수 없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슬프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이것이 우리 가족의 긴 미래사였다
   남자는 단지 거미를 죽이지 않고 내다 버렸지만
   그날 밤 나는 찢어진 벽지 속 황토 흙 속으로 들어갔다

※ 출처: 고형렬,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창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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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이 놓친 장음] ― ‘<한 잎의 여자>를 어찌 읽으라고~?!’

“여(女)”는 ‘계집 여, 딸 여, 별 이름 여, 성씨 여’로 쓰일 때는 상성으로 장음이고, ‘시집 보낼 여’로 쓰일 때는 거성으로 역시 장음이다. 그리고 ‘너 여(汝)’의 의미로 쓰일 때는, 상성으로 역시 장음이다. 그러니까 “여(女)”는 어떻게 쓰이든지 장음이다. 게다가 ‘평성화된 상성’의 목록에도, 또 ‘평성화 된 거성’의 목록에도 “여(女)”는 없다. 그러니까 “여(女)”는 여지없이 장음으로 발음되는 말이다.

자식을 뜻하는 “아들 자(子)”도 상성으로 장음이다. 따라서 여자는 [여ː자]처럼 첫음절 ‘여’를 장음으로 둘째 음절 자는 단음으로 발음해야 한다. 우리말에서 복합어가 아닌 단일어에서는 첫음절만 장음이 실현되고, 둘째, 셋째... 음절에서의 장음은 단음화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어사전’이나 ‘한국어발음사전’에서 여자를 단음으로 발음하라고 지시한다. 최한룡은 『서글프도록 슬픈 한국어학의 현실』에서 이를 통탄한다. 손종섭도 마찬가지다. 장음은 단순히 긴소리만이 아니다. 장음은 길며, 동시에 묵직한 소리고 높은 소리다. 좀 더 상세하게 말한다면, 상성은 ‘레’에서 시작해 ‘도’로 떨어졌다가 ‘솔’ 정도로 올라가는 소리다. 단음을 평성이라고 하는데, 이 평성, 즉 단음은 그저 짧은소리만이 아니다. 가볍고 잔잔하며 낮은 소리다.

  시어 “여자(女子)”의 가락을 구현하지 못하면, 어찌 오규원 시인의 「한 잎의 여자(女子)」를 제대로 맛을 낼 수 있을까. 시는 노래랬다. 노래하려면 적어도 계명은 알아야 하지 않을까. 오규원 시에서 저 ‘여자’가 무쟈게 많이 나온다. 제목 포함해 열아홉 번이나 나온다. 이참에 한 번씩덜…….

  한 잎의 女子 / 오규원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女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女子.

출처
https://url.kr/gbv2y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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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장음] ― ‘복합어에서 비어두(非語頭)의 장음’

‘단일어’에서 두 음절이 모두 장음일 때, 첫음절만 장음이 실현되고, 둘째 음절의 장음은 단음화된다. 그러나 ‘복합어’에서는 상황이 달라진다. 차재은(2011)의 「<큰사전> 고유어 복합어의 음장」(225면)에 따르면, 복합어에서는 첫음절이 아니라도 장음이 실현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말(語)”은 장음이다. “[말ː]/말소리[말ː-쏘리]”처럼 당연히 첫음절 ‘말’이 길게 발음된다. 그리고 “거센말”은 [거센-말]처럼 셋째 음절의 장음 ‘말’에서의 장음은 단음화된다. 이처럼 “[겹말]/[글말]/[높임말]/[머리말]/[흉내말]/[표준말]”은, 모두 장음이 실현되지 않아 단음으로 발음된다. 또 “[거ː-짓말]/[군ː-말]/[두ː-말]/[빈ː-말]/[속ː-말]/[준ː-말]”처럼 비어두(非語頭)에서 장음 ‘말’은, 장음으로 실현되지 않고, 단음화된다.

그러나 “[딴-말ː]/[별-말ː]/[잔-말ː]/[참말ː]은, 비어두에서도 장음이 실현된다. 그리고 ”[낱ː-말ː]/[뒷ː-말ː]/[센ː-말ː]처럼 첫음절과 둘째 음절에서 모두 장음이 실현되기도 한다. 이것이 단일어와 복합어의 차이이자, 복합어의 특징이다. 논문에서 발표된 학문적 성과가 책이나 혹은 학교의 지식이 되는 건, 하세월이다. ‘복합어 명사로서의 참말’과 ‘복합어 부사로서의 참말’ 사례로 실제의 발화에 가까운 발음을 해보자. 한 가지 더. 장음 뒤의 음절은, 제 음절의 원래 길이보다 조금. 더 짧아진다. 그것이 실제의 발화다.

<명사 복합어 ‘참말’>

참말 [참-말ː] ¶“사실과 조금도 틀림이 없는 말. 겉으로 내비치지 아니한 사실을 말할 때 쓰는 말. 자신의 말을 강조할 때 쓰는 말.”

① “‘참-말ː[참말]’이다, 춘향이 일편단심을 생각해 보아라/ 꿈속엔 훌륭한 꽃동산이 온전히 제 것이 되었을 그것이다.” (박재삼, 「화상보(華想譜)」, 2연 첫째, 둘째 문장).

② “‘참-말ː[참말]’이라고/ 이것 보라고/ 제가 저를 믿으려고 셔터를 눌러댔다” (이향아, 「사진이나 찍었다」, 단언 5~7행).

③ “‘참-말ː[참말]’이지, 문디 인간/ 더럽게 불쌍하다/ 이혼은 또 물 건너갔다” (천지경, 「이부자리 밑에서」, 단연 13~15행).

④ “‘참-말ː[참말]’이 나를 나락으로 떨어트릴 때/ 빨간 거짓말은 그물망을 펼쳐 나를 받아내네” (조미희, 「빨간 거짓말을 사랑했네」, 3연 1~2행).

⑤ “햇빛의 ‘참-말ː[참말]’을 받아쓰는 나무며 풀, 꽃들을 보며/ 나이 오십에 나도 받아쓰기 공부를 다시 한다” (임영석, 「받아쓰기」, 단연 2~4행).

⑥ “목젖에 걸린 이 ‘참-말ː[참말]’을/ 황홀한 거짓말로 불러내어 주세요” (유안진, 「황홀한 거짓말」, 5연 1~2행).

⑦ “낙엽이 질 때쯤이면/ ‘참-말ː[참말]’인 듯 거짓말인 듯” (김기만, 「사진첩에 꽂아 둔 계절」, 5연 1~2행).

⑧ “겨울꽃보다도 아픈 사연으로 핀다는 말이/ 진실로 ‘참-말ː[참말]’임을 알게 됩니다” (김인육, 「시인 따라 걷기」, 1연 6~7행).

  <부사 복합어 ‘참말’>

참말 [참-말ː] ¶“사실과 조금도 다름이 없이 과연.”

① “‘참-말ː[참말]’ 독하다.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꽃을 피웠다. 손에 얹힌 무, 몸집보다 가볍다” (마경덕, 「무꽃 피다」, 2연 3행).

② “불처럼. ‘참-말ː[참말]’ 불처럼 일던 그 목마르심,/ 오상(五傷) 받고 아직도/ 우주만치 남던 자비여/ 오 오 주여” (김남조, 「막달라 마리아·1」, 6연 1~5행).

③ “한 번쯤/ ‘참-말ː[참말]’ 한 번쯤/ 새벽 첫 두레박 속 샘물 같은/ 정한 그대 앞에 앉자 보고픈 마음” (김여정, 「가을밤의 외출」, 1연 1~6행).

④ “그리기도 그리운, ‘참-말ː[참말]’ 그리운/ 이 나의 맘 속에 속 모를 곳에/ 늘 그리는 그 사람을 내가 압니다” (김소월, 「맘속의 사람」, 1연 2~4행).

⑤ “가을밤/ 어쩌다가 ‘참-말ː[참말]’ 어쩌다가/ 밤거리에 나서면/ 한 십 년 만에 만난 옛친구처럼/ 손을 잡아 흔드는/ 고절감(孤節感)” (김여정, 「가을밤의 외출」, 1연 1~6행).

⑥ “총구녕이 점점 가까이와. 아따 지금 생각혀도 그땐 ‘참-말ː[참말]’ 오줌지릴 번 했시야” (정민경, 「그날」, 3연 첫째, 둘째 문장).

⑦ “진눈깨비 속을/ 웅크려 헤쳐나가며 작업시간에/ 가끔 이렇게 일 보러 나오면/ ‘참-말ː[참말]’ 좋겠다고 웃음 나누며/ 우리는 동회로 들어선다” (박노해, 「지문을 부른다」, 1연 1~5행).


출처
https://url.kr/psr2a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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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이 놓친 장음] ― ‘장단양음(長短兩音), 중(中)’

“중(中)”은 '장단양음'이다. 뜻에 따라서 단음으로도, 장음으로도 쓰인다. “중간(中間)”과 같이 ‘가운데 중(中)’이라는 의미로 쓰일 때는, 평성으로 단음이다. 그러나 “적중(的中)”이나 “중독(中毒)/중풍(中風)”과 같이 ‘맞을 중(中)’으로 쓰일 때는, 거성으로 장음이다. “중간[中間]/중학교[中學校]”는 단음으로, "중ː독[中毒]/중ː풍[中風]”은 장음으로 발음된다.

그러나 ‘한국어 사전’과 ‘한국어 발음 사전’에선, “중독(中毒)”과 “중풍(中風)”을 모두 단음으로 발음하라 지시한다. 수정해야 할 오류다.

“많은 사람이 절벽 ‘중간[中間]’에 기대어 산다” (양정희, 「삶과 절벽」, 단연 6행).

“‘중학교[中學校]’ 때 국어 선생님이/ 애기똥풀 꽃 속에서/ 동그란 안경을 쓰고/ 웃고 계셨다” (양정희, 「삶과 절벽」, 단연 6행).

“그 너스레 처음 들은 ‘중학교[中學校]’ 1학년 때” (이승하, 「자, 동동구리무요 동동구리무!」, 단연 8행).

“이젠 ‘중ː독[中毒]’이 되어버린/ 내 소중한 사랑이었다” (성숙, 「중독」, 5연 2~3행).

“기러기 신세 되고 나면 알코올 ‘중ː독[中毒]’에 우울증이라는데 괜찮은 거냐” (이문재, 「노후」, 6연 3행).

“저 아찔한 향기에 한번 ‘중ː독[中毒]’되어 버리면,” (이돈권, 「오월 동산의 찔레꽃」, 5연 4행).

“가끔 70년대처럼 연탄까스 ‘중ː독[中毒]’으로 죽고 싶었지만” (안현미, 「거짓말을 타전하다」).

“사랑은 그러니까 습관이 되어도 좋아요/ ‘중ː독[中毒]’이 되어도 괜찮죠 파도는 지치지 않잖아요” (손택수, 「봄은 자꾸 와도 새봄」, 3연 1~2행).

“나는 ‘중ː독자[中毒者]’였다/ 끊을 수 있으면 끊어봐라, 사랑이 큰소리쳤다” (마경덕, 「슬픔을 버리다」, 단연 1~2행).

“커피 ‘중ː독자[中毒者]’인 나는/ 눈물의 ‘중ː독자[中毒者]’” (김점미, 「검은 구토」, 4연 1~2행).

“도시로 나와 이십여 년, 소음굴 속에서만 살았다/ 소음 ‘중ː독자[中毒者]’가 되었다” (유홍준, 「소음은, 나의 노래」, 2연 1~2행).

“아버지가 ‘중ː풍[中風]’으로 쓰러진 나이를 넘었지만” (신경림, 「아버지의 그늘」, 3연 9행).

“‘중ː풍[中風]’ 든 柳氏의 대숲에 저녁 참새 시끄럽고” (황지우, 「가을 마을」, 단연 3행).

“우리는/ 신경을 앓는 ‘중ː풍[中風]’병자로 태어나/ 전신에 땀방울을 비늘로 달고” (기형도, 「가을 무덤―제망매가」, 7연 1~3행).

출처
https://url.kr/lqfyv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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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이 건져 올린 音長] ― ‘평성화된 상성, 꼬리 미(尾)’

□ 미행[尾行]/미ː행[美行]

“꼬리 미(尾)”는 상성으로 장음이다. 그러나 평성화(平聲化)되어 단음으로 발음되는 말이다. 예전엔 “미ː행[尾行]”으로 첫음절 ‘미’가 길게 발음되었겠으나, 이젠 “미행[尾行]”으로 짧게 발음해야 한다. 사전에는 아주 정확하게 단음으로 “미행[尾行]"이라 적어놓았다. 사전편찬자의 노고가 엿보인다.

“아름다울 미(美)도 상성으로 장음이다. 이 ‘미(美)’는 평성화된 적 없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장음이다. 따라서 ‘아름다운 행위라는 뜻’의 “미행(美行)”은, 미ː행[美行]처럼 첫음절 '미'를 장음으로 발음해야 한다. 이 역시 사전에서 정확하게 장음으로 표시해놓았다.

“하루, 어둠의 증언을 따라 나는 ‘미행[尾行]’하듯/ 시선을 옮기며 사라진 것들의 행방을 쫓는다” (권상진, 「저, 골목」, 단연 8행).

“그녀는 남이 칭송할 만한 미ː행[美行]을 언제나 몰래 하며 다닌다.”

출처
https://url.kr/x3qc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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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이 놓친 장음] ― ‘장음에 대한 예의’

“예(禮)”는 ‘예도 예, 예우할 예, 예물 예’라는 여러 의미를 지닌 말이다. 『漢韓大字典』(1605면)에 따르면, “예(禮)”는, 상성(上聲)으로 장음이다. 일반적 ‘한국어 사전’에서는, 모두 단음으로 발음하라고 지시한다. 오류다. 상성과 거성은, 장음으로 발음되는 말이다. 그러나 『표준 한국어 발음 사전』에서는, 장음이라고 정확하게 적어놓았다. 다행한 일이다. 문제는 ‘발음 사전’을 찾아보는 이들이 아주 적다는 것이다. 실은 ‘발음 사전’이 있다는 걸 아는 이들도 흔치 않은 게 현실이다.

상성으로서의 장음인 “예(禮)”는, 다음과 같이 모두 길게 발음해야 한다. “예ː배[禮拜]”, “예ː배당[禮拜堂]”, “예ː배보다[禮拜보다]”, “예ː배일[禮拜日]”, “예ː복[禮服]”, “예ː불[禮佛]”, “예ː불드리다[禮佛드리다]”, “예ː식[禮式]”, “예ː식장[禮式場]”, “예ː우[禮遇]”, “예ː의[禮義]”, “예ː의[禮儀]”, “예ː의범절[禮儀凡節]”, “예ː절[禮節]”, “예ː조[禮曹]”, “예ː조판서[禮曹判書]”, “예ː찬[禮讚]”, “예ː찬론[禮讚論]”, “예ː판[禮判]”, “예ː포[禮砲]”.

① “소나무에 대한 ‘예ː배[禮拜]’” (황지우, 「소나무에 대한 예배」, 제목).

② “나는 ‘예ː배한다[禮拜한다]’/ 우리의 생은 침묵/ 우리의 죽음은 말의 시작” (정현종, 「나는 별아저씨」, 3연 5~7행).

③ “그 옆에 은박지 같은 ‘예ː배당[禮拜堂]’이 있었지/ 틀린 기억이어도 좋아” (기형도, 「성탄목―겨울판화·3」, 3연 10~11행).

④ “남의 ‘예ː식[禮式]’이지만 나는 그에 맞는 ‘예ː의[禮儀]’를 보이려고 했다” (림태주, 「어머니의 편지」, 4연 부분).

⑤ “읍내 예ː식장[禮式場]이 떠들썩했겠다,/ 신부도 기쁜 눈물 흘렸겠다,/ 나는 기어이 찔레나무숲으로 달려가 덤불 아래 엎어놓은 하얀 사기 사발 속 너의 편지를 읽긴 읽었던 것인데, 차마 다 읽지는 못하였다” (송찬호, 「찔레꽃」, 1연 ~행).

⑥ “허공의 빈 나뭇가지처럼 아빠는/ 울고 있다만 딸아/ 너는 무심히 ‘예ː복[禮服]’을 고르고만 있구나” (오세영, 「딸에게」, 2~4행).

⑦ “새벽‘예ː불[禮佛]’ 모시는데 오늘따라 등꽃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는 것입니다.” (박규리, 「치자꽃 편지」, 1연 부분).

⑧ “넝마에게도 ‘예ː의[禮儀]’는 차리겠다” (복효근, 「콩나물에 대한 예의」, 16행).

⑨ “느티나무가 아니라면 ‘예ː의바른[禮儀바른]’ 그 애가/ 그런 실례를 할 리 없었을 것이다” (이상국, 「느티나무 아래서」, 5~6행).

⑩ “위패도, 영정도, 리본도,/ 망자에 대한 ‘예ː우[禮遇]’도 없이/ 무너진 가슴 무심히 지르밟던/ 이것이 당신들의 수준이었다” (김의곤, 「추모의 정석」, 4연 1~4행).

⑪ “음식이 먼저 이야기다/ 그것이 엄마의 ‘예ː절[禮節]’이다” (나태주, 「엄마의 예절」, 5연 3~4행).

⑫ “수다 ‘예ː찬[禮讚]’” (김기택, 「수다 예찬」, 제목).


출처
https://url.kr/xim5g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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