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승 / 송수권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 종일 방 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 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 집 처마 끝에 걸린 그 수구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발치로 바리때를 든 여승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 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온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 서서 합장하고
오던 길을 되돌아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여승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여승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시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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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든 땅  언덕 위에 / 송수권

낯선 곳 낯선 풍경을 지치도록 달리다 보면
예살던 징검돌 하나라도 이리도 마음에 맺히는 거
물방아는 처릉처릉 하얀 물잎새를 쳐내고
달맞이꽃이 환한 밤길은
솔솔 어디선가 박가분 냄새가 코를 미었다
나는 지금 남부 이탈리아 롬바디 평원을 달리며
이 평원을 다 준다 해도
내 편히 쉴 곳 없음을 안다
베르디가 노래한 아침 태양도 내 가슴을 적셔 내리진 못한다
어디에선가 거대한 성곽에서 종이 울리고
진군의 나팔소리 따라
천국이 하늘 위에 있음을 일러주지만
아무래도 내 깃들일 곳은
이 대평원이 아니라 대숲 마을을 빠져나온 저녁연기들이
낮게 낮게 깔리는 그러한 들판이었다
시냇물이 흐르고 몇 개의 징검돌들이 놓이고
벌떡벌떡 살아 뜀뛰던 어린 날처럼
물방개라도 만나 보고 싶은 곳이다
이틀이나 사흘쯤 낯선 곳 낯선 풍경을 달리다 보면
이리도 흙냄새 그리운 거
징검돌 하나라도 이리 마음속에 떠오르는 거
아아 문둥이 장돌뱅이처럼 내 가슴에 닳아지는 얼굴들
지금쯤 흙담집 앞뒤란을 캄캄하게 겨울눈이 내리고
햇빛이 맑은 아침나절은 앞마당 참새 발자국도 깝죽거리겠다
구석진 골목길 왕거무가 집을 짓다 말고
따뜻이 등을 기대이겠다
멀리 보리밭 들판을 청둥오리 떼 날아내리고
보리싹 밀싹 파먹느라고
또 남녘 벌 끝 시끄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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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돌방 / 조향미

할머니는 겨울이면 무를 썰어 말리셨다
해 좋을땐 마당에 마루에 소쿠리 가득
궂은 날엔 방 안 가득 무 향내가 났다
우리도 따순 데를 골라 호박씨를 늘어놓았다
실겅엔 주렁주렁 메주 뜨는 냄새 쿰쿰하고
윗목에선 콩나물이 쑥쑥 자라고
아랫목 술독엔 향기로운 술이 익어가고 있었다
설을 앞두고 어머니는 조청에 버무린
쌀 콩 깨 강정을 한 방 가득 펼쳤다
문풍지엔 바람 쌩쌩 불고 문고리는 쩍쩍 얼고
아궁이엔 지긋한 장작불
등이 뜨거워 자반처럼 이리저리 몸을 뒤집으며
우리는 노릇노릇 토실토실 익어갔다
그런 온돌방에서 여물게 자란 아이들은
어느 먼 날 장마처럼 젖은 생을 만나도
아침 나팔꽃처럼 금세 활짝 피어나곤 한다
아, 그 온돌방에서
세월을 잊고 익어가던 메주가 되었으면
한세상 취케 만들 독한 밀주가 되었으면
아니 아니 그보다
품어주고 키워주고 익혀주지 않는 것 없던
향긋하고 달금하고 쿰쿰하고 뜨겁던 온돌방이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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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의 약속 / 문태준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볕이 보고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볕 내리는 고운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

어느 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하였다

겨울 방이 방 한 켠에 묵은 메주를 매달아두듯 마음에 봄가을 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하릴없이 전나무 숲이 들어와 머무르는 때가 나에게는 행복하였다

수십 년 혹은 백 년 전부터 살아온 나무들,

천둥처럼 하늘로 솟아오른 나무들,

뭉긋이 앉은 그 나무들의 울울창창한 고요를 나는 미륵들의 미소라 불렀다

한 걸음의 말도 내놓지 않고 오롯하게 큰 침묵인 그 미륵들이 잔혹한 말들의 세월을 견디게 하였다

그러나 전나무 숲이 들어앉았다 나가면 그뿐, 마음은 늘 빈집이어서

마음 안의 그 둥그런 고요가 다른 것으로 메워졌다

대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듯 마음이란 그냥 풍경을 들어앉히는 착한 사진사 같은 것

그것이 빈집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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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노래 / 이 근 모

 

나는 대한의 흙
당신이 밟고 있는 이 땅엔
민족의 노래가 자랍니다

반만년 역사 속에서
익을 대로 익은 배달의 혼
찔레꽃 하얀 가슴에
당신과 나, 손잡고 서 있습니다

이 땅에 선을 그어 갈라선
당신과 나 슬픈 그리움에
사랑한다는 역설을 안고
만남의 장소에 나와
계절마다 풍성한 향기로
당신을 맞아들입니다

골 깊은 역사를 메꾸기 위한 몸부림
내 마음속 달궈온 몽돌을
뜨겁게 불 지펴 당신께 바칩니다

서로의 마음 비워 살가운 이 가을
우리의 사랑 핏물처럼 단풍 드는데
그간의 헤어진 한 세기 눈물
손수건 향수로 펄럭입니다

조국이라 부르는 한반도 깃발
흙의 노래여
역사의 정통성은 어디서 찾을까요
광활한 만주 땅 우리의 흙으로
서럽게 웁니다

그러나
만남 그 자체 더욱 크기에
봉숭아 꽃초롱 섬섬히,
내 어머니 옷고름 피워냅니다
우리는 만나야 하니까요

이 가을 흔드는 깃발
가을맞이 눈부신 흙의 역사입니다.

2018.9.14. 개성 남북 연락사무소 개설 뉴스를 듣고 쓰다.

 

작가 노트

시제 흙의 노래는 땅 표면에 퇴적된 물질이 어느 땅에 퇴적되어 있는 흙인가를 상기시켜 그 흙에서 숨 쉬는 민족의 정신을 흙과 하나로 보고 민족의 정체성을 상기시켜 보고자 쓴 시다.
우리 민족은 한의 정서가 깃들어 있는 민족이다.
만주 벌판까지 우리 땅 우리의 흙이었던 광활했던 기상이 한반도라는 땅의 흙으로 정착화 되면서 한을 민족의 정체성처럼 안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 한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찔레꽃과 봉선화이다. 찔레꽃은 배고픔과 부모 세대의 한, 봉선화는 일제 식민지 시절의 나라 잃은 한의 이미지가 있는 꽃이다.
이러한 민족의 정체성이 되는 밑바탕의 그림으로 찔레꽃과 봉선화의 이미지를 시어로 하여 광활한 만주 땅까지 지배하던 우리 민족이 한반도로 축소되고 그 축소된 땅에서 또다시 분단된 조국을 흙의 마음으로 발상전환해서 남북의 땅에 존재하는 흙은 동질의 한반도의 흙이라는 의미를 새겨 하나라는 의미와 함께 만나야 한다는 메시지를 새겨보는 시다.

이근모 시인은『월간 문학공간』으로 시 등단, 『현대문예』시조 등단하였으며 광주시인협회 회장 역임, 세계모던포엠작가 회장, 세종문화예술대상 문학상 등 다수 수상하였다. 광주 시집으로『12월32일의 노래』외 9권, 공저 다수, 칼럼집으로 이근모의 『시와 이야기』등을 상재 하였다.

 

* 부울경뉴스 『오늘의 자작추천시』는 부산 ․ 울산 ․ 경남 ․ 대구 ․ 경북지역에서 활동하는 중견시인들의 자작추천시를 시인이 직접 쓴 작가 노트와 함께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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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백석이 되어 / 이생진
-백석과 자야 2
 
나는 갔다
백석이 되어 찔레꽃 꺾어 들고 갔다
간밤에 하얀 까치가 물어다 준 신발을 신고 갔다
그리운 사람을 찾아가는데
길을 몰라도 찾아 갈 수 있다는
신비한 신발을 신고 갔다

성북동 언덕길을 지나
길상사 넓은 마당 느티나무 아래서
젊은 여인들은 날 알아채지 못하고
차를 마시며 부처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까치는 내가 온다고 반기며 자야에게 달려갔고
나는 극락전 마당 모래를 밟으며 갔다
눈 오는 날 재로 뿌려달라던 흰 유언을 밟고 갔다

참나무 밑에서 달을 보던 자야가 나를 반겼다
느티나무 밑은 대낮인데
참나무 밑은 우리 둘만의 밤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울었다
죽어서 만나는 설움이 무슨 기쁨이냐고 울었다
한참 울다 보니
그것은 장발이 그려 놓고 간
그녀의 스무 살 때 치마였다
나는 찔레꽃을 그녀의 치마에 내려놓고 울었다
죽어서도 눈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손수건으로 닦지 못하고 울었다

나는 말을 못했다
찾아오라던 그녀의 집을 죽은 뒤에 찾아와서도
말을 못했다
찔레꽃 향기처럼 속이 타 들어갔다는 말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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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비(哭婢) / 문정희


사시사철 엉겅퀴처럼 푸르죽죽하던 옥례엄마는
곡(哭)을 팔고 다니던 곡비(哭婢)였다

이 세상 가장 슬픈 사람들의 울음
천지가 진동하게 대신 울어주고
그네 울음에 꺼져버린 땅 밑으로
떨어지는 무수한 별똥 주워 먹고살았다
그네의 허기 위로 쏟아지는 별똥 주워 먹으며
까무러칠 듯 울어대는 곡(哭) 소리에
이승에는 눈 못 감고 떠도는 죽음 하나도 없었다
저승으로 갈 사람 편히 떠나고
남은 이들만 잠시 서성일 뿐이었다

가장 아프고 가장 요염하게 울음 우는
옥례엄마 머리 위에
하늘은 구멍마다 별똥 매달아 놓았다

그네의 울음은 언제 그칠 것인가
엉겅퀴 같은 옥례야, 우리 시인의 딸아
너도 어서 전문적으로 우는 법 깨쳐야 하리

이 세상 사람들의 울음
까무러치게 대신 우는 법
알아야 하리

- 문정희 시집 <찔레>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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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을 하느니 - 이상화(李相和)



어쩌면 너와 나 떠나야겠으며 아무래도 우리는 나눠야겠느냐.
남몰래 사랑하는 우리 사이에 남몰래 이별이 올 줄은 몰랐어라.

꼭두로 오르는 정열에 가슴과 입설이 떨어 말보다 숨결조차 못 쉬노라.
오늘 밤 우리 둘의 목숨이 꿈결같이 보일 애타는 네맘 속을 내 어이 모르랴.

애인아, 하늘을 보아라, 하늘이 까라졌고 땅을 보아라, 땅이 꺼졌도다.
애인아, 내 몸이 어제같이 보이고 네 몸도 아직 살아서 내 곁에 앉았느냐.

어쩌면 너와 나 떠나야겠으며 아무래도 우리는 나눠야겠느냐.
우리 둘이 나뉘어 생각하며 사는니 차라리 바라보며 우는 별이나 되자.

사랑은 흘러가는 마음 위에서 웃고 있는 가비어운 갈대꽃인가.
때가 오면 꽃송이는 곯아지고 때가 가면 떨어졌다 썩고 마는가?

님의 기림에서만 믿음을 얻고 님의 미움에서는 외롬만 받을 너이었더냐?
행복을 찾아선 비웃음도 모르는 인간이면서 이 고행을 싫어할나이었더냐?

애인아, 물에다 물탄 듯 서로의 사이에 경계가 없던 우리 마음 위로
애인아, 검은 그림자가 오르락내리락 소리도 없이 얼른 거리도다.

남몰래 사랑하는 우리 사이에 우리 몰래 이별이 올 줄은 몰랐어라.
우리 둘이 나뉘어 사람이 되느니 차라리 피울음 우는 두견이 되자.

오려무나, 더 가까이 내 가슴을 안아라, 두 마음 한 가락으로 얼어 보고 싶다.
자그마한 부끄럼과 서로 아는 믿븜 사이로 눈 감고 오는 방임을 맞이하자.

아, 주름잡힌 네 얼굴 이별이 주는 애통이냐? 이별은 쫓고 내게로 오너라.
상아의 십자가 같은 네 허리만 더우잡는 내 팔 안으로 달려오너라.

애인아, 손을 다고, 어둠 속에도 보이는 납색의 손을 내 손에 쥐어다고.
애인아, 말해다고, 벙어리 입이 말하는 침묵의 말을 내눈에 일러다고.

어쩌면 너와 나 떠나야겠으며 아무래도 우리는 나눠야겠느냐?
우리 둘이 나뉘어 미치고 마느니 차라리 바다에 빠져 두 마리 인어로나 되어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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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식당 / 백석

아이들 명절날처럼 좋아한다.
뜨락이 들썩 술레잡기, 숨박꼭질,
퇴 우에 재깔대는 소리, 깨득거리는 소리.
어른들 잔치날처럼 흥성거린다.
정주문, 큰방문 연송 여닫으며 들고 나고
정주에, 큰방에 웃음이 터진다.

먹고 사는 시름 없이 행복하며
그 마음들 이대도록 평안하구나,
새로운 동지의 사랑에 취하였으매
그 마음들 이대도록 즐거웁구나.
아이들 바구니, 바구니 캐는 달래
다 같이 한부엌으로 들여 오고,
아낙네들 아끼여 갓 헐은 김치
아쉬움 모르고 한식당에 올려 놓는다.

왕가마을에 밥은 잦고 국은 끓어
하루 일 끝난 사람들을 기다린데
그 냄새 참으로 구수하고 은근하고 한없이 깊구나
성실한 근로의 자랑 속에ㆍㆍㆍ

밭 갈던 아바이,  감자 심던 어머이
최뚝에 송아지와 놀던 어린것들,
그리고 탁아소에서 돌아 온 갓난것들도
둘레둘레 둘려 놓인 공동 식탁 우에,
한없이 아름다운 공산주의의 노을이 비낀다.

<백석 만의  개성>
음식의 이름
음식의 냄새
음식의 맛
온갖 종류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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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세상 사는 동안
가장 버리기 힘든 것 중 하나가
욕심이라서
인연이라서
그 끈 떨쳐버릴 수 없어 괴로울 때
이 물의 끝까지 함께 따라가 보시게
 
흐르고 흘러 물의 끝에서
문득 노을이 앞을 막아서는 저물 무렵
그토록 괴로워하던 것의 실체를 꺼내
물 한 자락에 씻어 헹구어 볼 수 있다면
 
이 세상 사는 동안엔 끝내 이루어지지 않을
어긋나고 어긋나는 사랑의 매듭
다 풀어 물살에 주고
달맞이꽃 속에서 서서 흔들리다 돌아보시게
돌아서는 텅 빈 가슴으로
 
바람 한 줄기 서늘히 다가와 몸을 감거든
어찌하여 이 물이 그토록 오랜 세월
무심히 흘러오고 흘러갔는지 알게 될지니
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마음을
무심이라 하나니
 
욕심을 다 버린 뒤
저녁 하늘처럼 넓어진 마음 무심이라 하나니
다 비워 고요히 깊어지는 마음을
무심이라 하나니
 
- 무심천 / 도종환



출처: https://biencan.tistory.com/5649 [먼. 산. 바. 라.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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