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면 / 심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지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드리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曺)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딩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둘처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한양대학교 한양어문연구회, 「한국현대시사자료대계 5」(동서문화원, 1987년), 197~198쪽



참고 동영상
2021년 심훈 탄생 120주념 기념 프로젝트

https://youtu.be/Tc6NCTXTD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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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무게와 질량을 측정하는 저녁 / 오새미


덩굴장미를 만지고 온 바람이
피에 젖은 손바닥을 보여주며
가슴에 묻어둔 이야기를 흘리는데
찔레꽃 사연이 박혀있다

발이 묶인 바람은 붉은빛을 띠었고
날개 달린 얼굴은 하얗게
흔들리고 있었다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해
한 무리의 바람을 토해놓고
무심하게 떠나버리는 구름버스
내일의 비를 머금고 골목으로 사라진다

허공으로 귀가하는 늦은 오후
낯선 그림자들의 어깨에 걸쳐있는
한 짐 바람의 무게

아무도 짐작할 수가 없어
멀어지는 별빛처럼 스러지는데

가시에 찔렸던 날들의 상처는
가여운 질량을 기록해 놓은 빛바랜 잎사귀
물풀처럼 떠돌다 쓰러지기만 했던
텅 빈 저녁이 쓸쓸하다

밀도 높은 하루가 쌓이고
밤은 바람에 밀려
어둠의 가시를 퇴적하다 잠든다

바람에 제 발등을 찍힌 저녁
바람의 측량사는 얼굴이 없어
가시에 찔린 표정만 날아다닌다




⸺계간 《열린시학》202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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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새미 / 본명 오정숙. 2018년 《시와 문화》 등단. 시집 『가로수와 수학시간』 『곡선을 기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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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까닭 / 한용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루어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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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 사진관집 이층 / 신경림

 

사진관집 이층에 하숙을 하고 싶었다.

한밤에도 덜커덩덜커덩 기차가 지나가는 사진관에서

낙타와 고래를 동무로 사진을 찍고 싶었다

아무 때나 나와 기차를 타고 사막도 바다도 갈 수 있는.

누군가 날 기다리고 있을 그 먼 곳에 갈 수 있는.

어렸을 때 나는 역전 그 이층에 하숙을 하고 싶었다.

 

이제는 꿈이 이루어져 비행기를 타고

사막도 바다도 다녀봤지만, 나는 지금 다시

그 삐걱대는 다락방에 가 머물고 싶다.

아주 먼 데서 찾아왔을 그 사람과 함께 누워서

덜컹대는 기차 소리를 듣고 싶다.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 소리를 듣고 싶다.

낙타와 고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싶다.

 

다락방을 나와 함께 기차를 타고 싶다.

그 사람이 날 찾아온 길을 되짚어가면서

어두운 그늘에도 젖고 눈부신 햇살도 쬐고 싶다.

그 사람의 지난 세월 속에 들어가

젖은 머리칼에 어른대는 달빛을 보고 싶다.

살아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첫날을

다시 그 삐걱대는 사진관집 이층에 가 머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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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아래 / 이정록


  제 얼굴로 겨눴던 부채 끝을
  어린것들에게 돌리는 데까지 가야
  마음도 주름을 접고 편해지는 거여
  자네도 땀 범벅인 몸뚱어리 제쳐놓고
  새끼들한테 부채질하는 것을 보니께
  이제 진짜 어미가 된 것 같구먼
  세상에서 첫째로 독한 짐승이 어미라는데
  어미 중에서도 제일 독한 홀어미가 되었구먼
  신랑 생각은 빨리 털어버리고
  여기에다 맘 붙이고 살아가자고,
  멍하니 평생 바다 끝만 내다볼 것 같더니
  어찌어찌 새끼들 추스리는 것을 보니께
  이제 가라고 해도 안 가겠지만
  바람아래 떠나는 순간
  세상 바람통 속으로 겨 들어가는 것이여
  저 뻘 속 모래알들이 어찌 그냥 모래들이고
  어찌 그냥 조개껍질이겠는가
  억만 번도 더 달래고 얼래야
  밀물 썰물 몽땅 품을 수 있는
  오지랖이 되는 거여
  그런 걸 몸이라고 하는 거여


*바람아래는 안면도 바닷가에 있는 해수욕장 이름이다

ㅡ이정록 시집《제비꽃 여인숙》민음사,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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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서 처음 보고 /  김병연

 

金笠時 - 김립시

그대가 시경 한 책을 줄줄 외우니

나그네가 길 멈추고 사랑스런 맘 일어나네.

빈 집에 밤 깊으면 사람들도 모를 테니

삼경쯤 되면 반달이 지게 될 거요.

 

女人時 - 여인시

길가에 지나가는 사람이 많아 눈 가리기 어려우니

마음 있어도 말 못해 마음이 없는 것 같소

담 넘고 벽 뚫어 들어오기가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내 이미 농부와 불경이부 다짐했다오.

 

김립: 김병연, 김삿갓

 

 

나를 돌아보며 우연히 짓다. / 김병연

 

푸른 하늘 웃으며 쳐다보니 마음이 편안하건만

세상길 돌이켜 생각하면 다시금 아득해지네.

가난하게 산다고 집사람에게 핀잔 받고

제멋대로 술 마신다고 시중 여인들에게 놀림 받네.

세상만사를 흩어지는 꽃같이 여기고

일생을 밝은 달과 벗하여 살자고 했지.

내게 주어진 팔자가 이것뿐이니

청운이 분수밖에 있음을 차츰 깨닫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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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목 / 고영민


  한나절 새끼 낳을 곳을 찾아 울어대던
  고양이가 잠잠하다
  잠잠하다

  불을 지피려 아궁이 앞에 앉으니
  구들 깊은 곳 새끼고양이 울음소리가
  야옹지다

  오늘밤, 이 늙은 누대(累代)의 집은 구들 속
  새끼를 밴 채 진통이 심하겠다
  불 지피지 마라
  불 지피지 마라
  
  냉골에 모로 누워 식구들은 잠들고
  나 혼자 두렷이 깨어
  바닥에 귀 대노라면  
  내 귀 달팽이는 감잎만큼 커졌다가
  연잎만큼 커졌다가  

  쉿, 누가 들을까
  어미는 발끝을 든 채 새끼를 물어
  눈 못 뜬
  자리를 옮기고 또,
  자리를 옮기고


ㅡ고영민 시집《공손한 손》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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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 유치환

고독은 욕되지 않으다.
견디는 이의 값진 영광.

겨울의 숲으로 오니
그렇게 요조(窈窕)턴 빛갈도
설레이던 몸짓들도
깡그리 거두어 간 기술사(奇術師)의 모자(帽子).
앙상한 공허만이
먼 한천(寒天) 끝까지 잇닿아 있어
차라리
마음 고독한 자의 거닐기에 좋아라.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죽어지고 숨어야 하는 이 계절엔
나의 뜨거운 노래는
여기 언 땅에 깊이 묻으리.

아아 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
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
마침내 비굴한 목숨은
눈을 에이고, 땅바닥 옥에
무쇠 연자를 돌릴지라도

나의 노래는
비도(非道)를 치레하기에 앗기지는 않으리.

들어 보라.
저 거짓의 거리에서 물결 쳐 오는
뭇 구호와 빈 찬양의 헛한 울림을
모두가 영혼을 팔아 예복을 입고
소리 맞춰 목청 뽑을지라도

여기 진실은 고독히
뜨거운 노래 땅에 묻는다.

뭇: 관형사_ 수효가 매우 많은.
헛하다: 동사_일을 아무런 보람 없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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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양 / 이건청

 

 

아버지의 등뒤에 벼랑이 보인다. 아니, 아버지는 안 보이고 벼랑만 보인다.

요즘엔 선연히 보인다. 옜날, 나는 아버지가 산인 줄 알았다. 차령산맥이거나

낭림산맥인 줄 알았다. 장대한 능선들 모두가 아버지인 줄만 알았다. 그때 나

는 생각했었다. 푸른 이끼를 스쳐간 그 산의 물이 흐르고 흘러, 바다에 닿는

것이라고. 수평선에 해가 뜨고 하늘도 열리는 것이라고. 그때 나는 뒷짐 지고

아버지 뒤를 따라갔었다. 아버지가 아들인 내가 밟아야 할 비탈들을 앞장서 가

시면서 당신 몸으로 끌어안아 들이고 있는 걸 몰랐다. 아들의 비탈들을 모두

끌어안은 채, 까마득한 벼랑으로 쫒기고 계신 걸 나는 몰랐었다.

 

나 이제 늙은 짐승 되어 힘겨운 벼랑에 서서 뒤돌아보니 뒷짐 지고 내 뒤를

따르는 낯익은 얼굴 하나 보인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쫓기고 쫓겨 까마득한 벼

랑으로 접어드는 내 뒤에 또 한 마리 산양이 보인다. 겨우겨우 벼랑 하나 발

딛고 선 내 뒤를 따르는 초식 동물 한 마리가 보인다.

Posted by 시요정_니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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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   정일근



먼 바다로 나가 하루 종일
고래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사람의 사랑이 한 마리 고래라는 것을
망망대해에서 검은 일 획 그으며
반짝 나타났다 빠르게 사라지는 고래는
첫사랑처럼 환호하며 찾아왔다

이뤄지지 못할 사랑처럼 아프게 사라진다
생의 엔진을 모두 끄고
흔들리는 파도 따라 함께 흔들리며
뜨거운 햇살 뜨거운 바다 위에서
떠나간 고래를 다시 기다리는 일은
그 긴 골목길 마지막 외등
한 발자국 물러난 깜깜한 어둠 속에 서서
너를 기다렸던 일

그때 나는 얼마나 너를 열망했던가
온몸이 귀가 되어 너의 구둣발 소리 기다렸듯
팽팽한 수평선 걸어 내게로 돌아올
그 소리 다시 기다리는 일인지 모른다

오늘도 고래는 돌아오지 않았다
바다에서부터 푸른 어둠이 내리고
떠나온 점등인의 별로 돌아가며
이제 떠나간 것은 기다리지 않기로 한다

지금 고래가 배의 꼬리를 따라올지라도
네가 울며 내 이름 부르며 따라올지라도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사람의 서러운 사랑 바다로 가
한 마리 고래가 되었기에
고래는 기다리는 사람의 사랑 아니라
놓아주어야 하는 바다의 사랑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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