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의 강 / 마종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 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 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 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 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마종기 시인과 황동규 시인의 이야기

'시낭송대회 출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좌탈(坐脫) / 김사인  (0) 2022.03.30
조선의 눈동자 / 곽재구  (0) 2022.03.25
낙화 / 조지훈  (0) 2022.03.21
한강 아리랑 / 한석산  (0) 2022.03.21
어서 너는 오너라 /박두진  (0) 2022.03.04
Posted by 시요정_니케
,

낙화 / 조지훈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닥아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Posted by 시요정_니케
,

한강 아리랑 / 한석산


  천년을 흘러도 한 빛깔, 물 파랑 쳐 오는
  갈기 세운 물소리 조국의 아침을 깨운다.

  한강 1300리 물길 하늘과 땅 이어주는
  구름 머문 백두대간 두문동재 깊은 골
  뜨거운 심장 울컥울컥 꺼내놓는 용틀임 춤사위
  우리 겨레의 정신과 육신을 가누는
  민족의 젖줄 한강 발원지 여기 검룡소.

  큰 물줄기 맑고 밝게 뻗어 내리는
  골지 천과 아우라지 조양 강 휘돌아 친 두물머리 이끈
  한강 한복판에 떠 있는 선유도 갈대숲
  물새 둥지 튼 그 속에서도 꽃피웠네.

  대한민국 서울 기적 이룬 한강
  굴절된 역사의 아픈 눈물 삼키며 제 몸 뒤집는다.
  이런 날에 우리 다 같이 부르는 가슴 벅찬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우리 가는 곳 어딘지 몰라도
  가버린 것들은 허망하게 아름다운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청동기 문화를 세운, 오늘날 우리 민족의 선조
  이 땅 순한 백성들이 원시생활 하던 시절부터
  강에 안기던 사람 품을 내주던 강
  세월이라는 깊은 강가에 서면 고요한 강물이 내 영혼을 끌고 가네.

  먼 옛날 삼각산 소나무 아래 어매 아배 뼈를 묻고,
  삽을 씻으며 민초의 한을 씻던 아리수
  넓고 깊은 어머니 가슴 강물도 차운 날에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젖가슴 여미는 어머니 가슴 헤집는 젖둥이
  온갖 풀꽃 향기에 젖은 물가에 앉아 있어도 목이 마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한석산 시집, "풍금", 한국문학신문, 2020년

'시낭송대회 출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화의 강 / 마종기  (0) 2022.03.21
낙화 / 조지훈  (0) 2022.03.21
어서 너는 오너라 /박두진  (0) 2022.03.04
휩쓸려 가는 것은 바람이다 / 박두진  (0) 2022.03.04
낙화 일기 / 김년균  (0) 2022.03.04
Posted by 시요정_니케
,

어서 너는 오너라 /박두진


복사꽃이 피었다고 일러라. 살구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너이 오 오래 정 드리고 살다 간집, 함부로 함부로 짓밟힌 울타리에, 앵도꽃도 오얏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낮이면 벌떼와 나비가 날고, 밤이면 소쩍새가 울더라고 일러라.


다섯 뭍과, 여섯 바다와, 철이야. 아득한 구름 밖 아득한 하늘 가에, 나는 어디로 향을 해야 너와 마주 서는게냐.

달 밝으면 으례 뜰에 앉아 부는 내 피리의 서른 가락도 너는 못듣고, 골을 헤치며 산에 올라 아침마다 푸른 봉우리에 올라 서면, 어어이 어어이 소리높여 불르는 나의 음성도 너는 못듣는다.

어서 너는 오너라. 별들 서로 구슬피 헤여지고, 별들 서로 정답게 모이는 날, 흩어졌던 너이 형 아우 총총히 돌아오고, 흩어졌던 네 순이도 누이도 돌아오고, 너와 나와 자라난, 막쇠도 돌이도 복술이도 왔다.

눈물과 피와 푸른 빛 기빨을 날리며 오너라.  ----- 비둘기와 꽃다발과 푸른 빛 기빨을 날리며 너는 오너라.-----

복사꽃 피고, 살구꽃 피는 곳, 너와 나와 뛰놀며 자라난, 푸른 보리밭에 남풍은 불고, 젓빛 구름, 보오얀 구름 속에 종달새는 운다.

기름진 냉이꽃 향기로운 언덕, 여기 푸른 잔디밭에 누워서, 철이야, 너는 늴늴늴 가락 맞춰 풀피리나 불고, 나는, 나는, 두둥싯 두둥실 붕새춤 춤며, 막쇠와, 돌이와, 복술이랑 함께, 우리, 우리, 옛날을, 옛날을, 딩굴어 보자.

유튜브 해설강의

https://youtu.be/nWPJtSf0PqQ

 

 

종달새 소리
https://youtube.com/shorts/Wl85lwz43WY?si=Vf1l4TP_IrdfPRhu

소쩍새 소리
https://youtube.com/shorts/yFOYnIZiXJA?si=rXmT24NhKf8w66O3

'시낭송대회 출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낙화 / 조지훈  (0) 2022.03.21
한강 아리랑 / 한석산  (0) 2022.03.21
휩쓸려 가는 것은 바람이다 / 박두진  (0) 2022.03.04
낙화 일기 / 김년균  (0) 2022.03.04
바람의 언덕에서 /신승희  (0) 2022.03.04
Posted by 시요정_니케
,

휩쓸려 가는 것은 바람이다 / 박두진

휩쓸려 가는 것은 바람이다.
보고 싶은, 보고 싶은 나라의 사람의 초록빛 이름이다.
빈 들의 작은 꽃, 꽃을 보고 앉아 있는 사람의 가난한 마음
다시는 생각하지 않으려던 사람의 초록빛 목소리
다시는 생각하지 않으려던 사람의 어질디어진 눈길이다.
휩쓸려 가는 것은 바람이다.
채찍에 구둣발에 몽둥이와 총칼 그 비밀한 그물에 쫓기이는
쓸쓸한 황톳벌 침침한 부둣가 창백한 문명의 거리
아무에게도 말 할 곳 없는
약하디 약한 사람들의 공포의 심장 굶주린 창자
낮에도 으르렁거리는
강한 자 횡포한자 무법한 자들의 나라의 맹수들의 목덜미
떼무더기의 내일의 허물어져가는 자들의 뼈다귀
휩쓸려 가는 것은 바람이다.
저 바다에서 아침에서 초록의 벌판에서 솟아나는
눈이 부신 찬란한 새로운 나라사람들의 앳된 소리
소년들의 깃발의 보고 싶은 나라사람들의 합창이다.
아 어제의 것 사라져가야 할 것들의 죽음
죽은 자는 진실로 죽은 자들이 장사하는
빛이 있는 빛의 나라 빛의 대열의
휩쓸려가는 것은 바람,
휩쓸려 가는 것은 바람이다.

출처: 박두진, 시선집《제1회 지용문학상-서한체》(깊은샘,1989,12.10.)

'시낭송대회 출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강 아리랑 / 한석산  (0) 2022.03.21
어서 너는 오너라 /박두진  (0) 2022.03.04
낙화 일기 / 김년균  (0) 2022.03.04
바람의 언덕에서 /신승희  (0) 2022.03.04
아버지의 아궁이 / 엄정옥  (0) 2022.02.27
Posted by 시요정_니케
,

낙화 일기 / 김년균

 

하늘과 무슨 인연 있기로

세상 기슭에 내려와

차갑고 먼 길,

줄기찬 비바람 맞고 있다.

 

하늘 밖으로 해와 달은 빙빙 돌고,

허공에 줄줄이 떠올라 곡예를 부리는

신기한 별들, 혹은 땅에서도 그만큼 솟은

사람들을 그리며,

꽃으로 보답하고자

향기도 전하고자

밤새워 마음을 닦았으나

 

아무 소용 없고,

남은 길 중턱도 못 오른 채

주저앉고 마느니,

저들의 광대도 못 되었구나.

 

뒤에서 기다리는 이에게

아픈 상처만 남겼구나.

Posted by 시요정_니케
,


바람의 언덕에서 /신승희

살아가는 것은 다 바람이다
생을 사랑한다는 것은 바람 속을 걷는 일이다
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로, 흔들리는 갈대의 몸짓으로
장대비 같은 폭우 속에서 휘적이는 날개의 젖은 모습으로
가끔은 태풍에 쓰러진 잣나무의 굽은 등으로
때로는 해일이 스쳐 간 잔해 위에 아이의 울음으로
비틀대는 바람 속의 숨 가쁜 걸음걸음들


한때, 모국어도 바람에 쓸려갔다 되돌아오지 않았든가
민초에서, 천하의 진시황도 떠난 것은 바람이다
심산유곡 산새로 지저귀는 것도
바위 틈새 해풍을 먹고 사는 것도
한 잎 출렁이는 이파리같이 인연의 물결 따라 밀려왔다 밀려간다.
우리 모두 냉정한 바람에 실려 가는 구름, 구름들이다

이래 스치고 저래 스치는 구름, 구름들
이래 스치고 저래 스치는 바람, 바람들

저 하얗게 질색하는 절벽 밑 바위를 봐라
멋지고 잘생긴 수석의 볼을 철썩, 때리고도
그것도 모자라 흰 거품을 물고 사방을 흩트리며
성난 용의 몸부림처럼 꿈틀대며 달려드는 파도
이 세상, 바람으로 생기는 일이다
우리 모두 바람 앞에 돌아가는 언덕에 풍차일 뿐이다

Posted by 시요정_니케
,

아버지의 아궁이 / 엄정옥

아버지가 가마솥에 불을 지피셨다
잘 마른 나뭇가지에 불이 붙으면
아궁이는 뒤뜰 감나무 홍시 빛깔보다 더 환해졌다
지난 계절 내내 가지에 묻은 바람들이 깨어나
너울너울 불꽃이 되어 흔들렸다

나는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나무의 생이 타들어가는 냄새를 맡았다
비리한 듯 은근한 듯
얻어먹은 술밥에 취한 것처럼 혼곤한 그 냄새가
삭정이 같이 구멍 숭숭한 처마를 지나고
뒤란 꽁무니에 매달린 굴뚝까지 돌아나가야
가마솥의 여물은 질긴 가난처럼 익었다

여덟 아이들 중 서넛은
기슭에 떨어진 도토리처럼 집을 떠났고
남은 아이들이 복닥거리는 작은 방에
서서히 온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저녁이면 어김없이 냄새가 피어올랐다
여위어 가던 아버지가 한 줌의 재가 되기 전까지는

아직도 아버지는 이승의 아궁이로 불을 지피시고
익숙한 나무 타는 냄새와 구들장을 번져가는 온기로
나는 오늘도 저물어가는 이 저녁을 살아낸다


ㅡ《경찰문화마당》2014년 제15회 경찰문화대전 금상 수상작

Posted by 시요정_니케
,

산문에 기대어/송수권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날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 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 옴을.



[해설] 수지쌤의 국어시간

링크: https://youtu.be/nyUh0yTrscE

[송수권 깊이 알기] 네이버 블로그 청개구리시험지

링크: https://m.blog.naver.com/hyeonchang0598/221492896965
Posted by 시요정_니케
,

나는 문경새재의 저녁으로 눕는다 /  황종권

이것은 곰의 갈비뼈 속으로 난 길이다
저 억새풀이 곰의 털이라는 것은 바람만이 안다
뻣뻣하지만 구불거리는 나무는 곰의 이빨

돌부리에 넘어진 무릎만이 비로소 신발 끈을 매고
첩첩 뿌리로부터 멀어지는 꽃들이 곰의 위장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발자국을 밀어 올리는 것은 길이 아니라
곰의 숨소리, 으스스 별자리가 돋는 것도
제 등허리를 바위에 긁은 까닭이다

발목이 늘 벼랑인 사람들이 있다
떨어지지도 주저앉지도 못하는 힘으로
아비가 될 사람들은 발목에 불씨를 지폈으리라
아니 발바닥에 물집 잡히는 힘으로
신열 들키지 않게 제 짐을 산맥에 맡겼으리라

문경새재, 산적도 피해 가는 길
피처럼 붉은 달, 곰의 내장을 밝혀준다
울 수 없어 노래하고 노래할 수 없어
발목으로 저녁을 불러들였을 나의 아비들
젖은 눈썹을 지닌 사람은 저 고원이 고향이다

바람마저 곰의 뼈를 빌려 노래하는 문경새재
흙바닥에 나의 이마가 찍혔다
달밤은 춥고 나는 닳도록 걸어야 할 길이므로
목 길고 허리 가는 억새꽃밭의 저녁으로 눕는다

 

글자수: 388

Posted by 시요정_니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