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 성재경

그날은

아무도 물건을 사지 않았다

굴비 한 손 보리쌀 한 됫박 머리빗 한 개

아무도 물건을 팔지 않았다

식육점도 포목점도 어전도 닫혀 있었다

아우내장터 그날은

아무도 소리 내어 웃지 않았다

수다쟁이 할매도 짓궂던 더벅머리 총각도

비틀거리거나 들내지 않았다

무거운 발걸음 앞만 보고 내디뎠다

사월 초하루 그날은

아무도 부모 자식 걱정하지 않았다

보고 싶은 사람도 생각나지 않았다

하늘 아래 땅 위에 사람들이 모여

가슴과 가슴이 손과 손이 만났다

목이 터져나가던 그날은

그들의 손엔 어떤 쇠붙이도 없었다

그 흔한 낫 한 자루 부엌칼 호미마저도

삐뚤게 그린 태극기와 맨주먹

만세 부르는 입과 충혈 된 눈이 전부였다

유관순의 아우내장터 그날은

붉은 피에 또 뜨거운 피가 엉기고

죽음 위에 볏단처럼 주검이 덮여갔지만

그날은 이 나라 정신이 바로 세워지고

비로소 광복이 시작되는 날 이었다

 

Posted by 시요정_니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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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월향에게 / 한용운

 

 

  계월향이여, 그대는 아리땁고 무서운 최후의 미소를 거두지

아니한 채로 대지의 침대에 잠들었습니다.

  나는 그대의 다정을 슬퍼하고 그대의 무정을 사랑합니다.

 

  대동강에 낚시질하는 사람은 그대의 노래를 듣고 모란봉에 밤놀이

하는 사람은 그대의 얼굴을 봅니다.

  아이들은 그대의 산 이름을 외우고 시인은 그대의 죽은 그림자를

노래합니다.

 

  사랑은 반드시 다하지 못한 한을 끼치고 가게 되는 것이다.

  그대는 남은 한이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그 한은 무엇인가.

  그대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대의 붉은 한은 현란한 저녁놀이 되어서 하늘 길을 가로막고 황

량한 떨어지는 날을 돌이키고자 합니다.

 

  그대의 푸른 근심은 드리우고 드린 버들실이 되어서 꽃다운 무리

를 뒤에 두고 운명의 길을 떠나는 저문 봄을 잡아매려 합니다.

  나는 황금의 소반에 아침 별을 받치고 매화가지에 새봄을 걸어서

그대의 잠자는 곁에 가만히 놓아드리겠습니다.

  자, 그러면 속하면 하룻밤, 더디면 한겨울 사랑하는 계월향이여!

 

 

Posted by 시요정_니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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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이여 당신은 진정 고아일다 / 유치환
 
나의 눈을 뽑아 북악의 산성 위에 높이 걸라
망국의 이리들이여
내 반드시 너희의 그 불의의 끝장을 보리라
 
쓰라린 쓰라린 조국의 오랜 환난의 밤이 밝기도 전에
너희 다투어 그를 헐벗기어 아우성치며
일찌기 원수 앞에 떳떳이 쓰지 못한 환도(環刀)이어든
한낱 사조(思潮)를 신봉하여
골육의 상쟁을 선동하여 불놓기를 서슴지 않고
보잘것 없는 제 주장을 고집하기에
감히 나라의 망함은 두러하지 않나니
매국이 의를 일컫고
사욕(私慾)의 견구(犬狗)는 저자를 이루고
오직 소리 소리 패악하는 자만이 도도히 승세하거늘
나의 눈을 뽑아 북악의 산성 위에 높이 걸라
일찌기 악한 것이 끝내 영화하고
불의가 의를 낳음은 보지 못했느니
오늘에 이르러 너희의 행패가
드디어 또한번 원수를 이 땅에 이끌어
그 무도한 발길에 무찔러 조국의 산하가 마르고
사직의 주추에 잡초가 더욱더 우거지고
망국의 성터 위에 별들이 모여 떠는
수많은 겨레의 생령이 죽어 가는 일이 다시없기를
아아 뉘가 어찌 기약하료
내 반드시 너희의 이 불의의 끝장을 보리라
 
---그러나 조국이여
양춘(陽春)이라 봄이 오면
아지랑이 날으는 이 강산에
진달래 철 따라 피어 널림이
아아 서럽지 서럽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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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은 길을 묻지 않는다 / 이근배

새들은 저희들끼리 하늘에 길을 만들고
물고기는 너른 바다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데
사람들은 길을 두고 길 아닌 길을 가기도 하고
길이 있어도 가지 못하는 길이 있다
산도 길이고 물도 길인데
산과 산 물과 물이 서로 돌아누워
내 나라의 금강산을 가는데
반세기 넘게 기다리던 사람들
이제 봄, 여름, 가을, 겨울
앞 다투어 길을 나서는 구나
참 이름도 개골산, 봉래산, 풍악산
철따라 다른 우리 금강산
보라. 저 비로봉이 거느린 일만 이천 묏부리
우주만물의 형상이 여기서 빚고
여기서 태어났구나.
깎아지른 바위는 살아서 뛰며 놀고
흐르는 물은 은구슬 옥구슬이구나
소나무, 잣나무는 왜 이리 늦었느냐 반기고
구룡폭포 천둥소리 닫힌 세월을 깨운다.
그렇구나
금강산이 일러주는 길은 하나
한 핏줄 칭칭 동여매는 이 길 두고
우리는 너무도 먼 길을 돌아왔구나
분단도 가고 철조망도 가고
형과 아우 겨누던 총부리도 가고
손에 손에 삽과 괭이 들고
평화의 씨앗, 자유의 씨앗 뿌리고 가꾸며
오순도순 잘 사는 길을 찾아왔구나
한 식구 한솥밥 끓이며 살자는데
우리가 사는 길 여기 있는데
어디서 왔느냐고 어디로 가느냐고
이제 금강산은 길을 묻지 않는다

출처: 시집『종소리는 끝없이 새벽을 깨운다』(동학사, 2006). 2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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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을 지나며 / 문무학

 

살아가며 꼭 한 번은 만나고 싶은 사람
우연히 정말 우연히 만날 수 있다면
가을날 우체국 근처 그쯤이면 좋겠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기엔 우체국 앞 만한 곳 없다
우체통이 보이면 그냥 소식 궁금하고
써 놓은 편지 없어도 우표를 사고 싶다.

그대가 그립다고, 그립다고, 그립다고
우체통 앞에 서서 부르고 또 부르면
그 사람 사는 곳까지 전해질 것만 같고

길 건너 빌딩 앞 플라타너스 이파리는
언젠가 내게로 왔던 해 묵은 엽서 한 장
그 사연 먼 길 돌아와 발끝에 버석거린다.

물 다든 가로수 이파리처럼 나 세상에 붙어
잔바람에 간당대며 매달려 있지만
그래도 그리움 없이야 어이 살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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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바다2 / 문충성

 

누이야, 오늘은 어머니가 키우는 눈물 속

바다에 비가 내린다. 빛 잃은 별떨기들 빗속으로 사각사각

부셔져 내리고 너와 나의 목숨이 그

빛 속에서 새로 깨어남을 알겠느냐. 어머니의

굴욕과 고독이 네 핏줄에 자라남을 알겠느냐.

 

백 년을 갈아도 날이 서지 않는 칼 한 자루, 어찌

비내리는 밤을 잘라낼 수 있겠느냐, 제주 바다는 아랑곳없이

폭풍우치는 샛바람을 열어놓고 울타리

돌담 구멍을 들락이며 하얗게

어머니의 주름진 한숨을 청대왓에 빨아낸다.

 

누이야, 어머니 눈물 속 바다에서 자라 바다로

돌아가는 길. 한 줌 모래가 될까, 바람에 흔들리다

삼사월 따스한 햇살 속에 햇살로 남아 바람 속에

바람결로 녹아 바다 속으로 바다 속으로 무너져가는 것이다.

짭짤한 세상이 무너져가다 일어서는 것이다.

 

오늘은 어머니가 키우는 눈물 속

바다에 비가 내리고 빗발 속 골목서

팽이치기하는 너와 나의 유년이 뱅글 매를 맞고

가만히 귀 줘 들어 보라, 샛바람 속

바람을 지우며 뛰는 백록의 발걸음 소리

또 하나 눈먼 문명이 휘몰아오는 시커먼 순수를 보라, 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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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탁 / 배한봉


  새벽 어판장 어선에서 막 쏟아낸 고기들이 파닥파닥 바닥을 치고 있다.
  육탁(肉鐸) 같다.
  더 이상 칠 것 없어도 결코 치고 싶지 않은 생의 바닥
  생애에서 제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
  나도 한때 바닥을 친 뒤 바닥보다 더 깊고 어둔 바닥을 만난 적이 있다.
  육탁을 치는 힘으로 살지 못했다는 것을 바닥 치면서 알았다.
도다리 광어 우럭들도 바다가 다 제 세상이었던 때 있었을 것이다.
  내가 무덤 속 같은 검은 비닐봉지의 입을 열자
  고기 눈 속으로 어판장 알전구 빛이 심해처럼 캄캄하게 스며들었다.
  아직도 바다 냄새 싱싱한,
  공포 앞에서도 아니 죽어서도 닫을 수 없는 작고 둥근 창문
  늘 열려 있어서 눈물 고일 시간도 없었으리라.
   고이지 못한 그 시간들이 염분을 풀어 바닷물을 저토록 짜게 만들었으리라.
  누군가를 오래 기다린 사람의 집 창문도 저렇게 늘 열려서 불빛을 흘릴 것이다.
  지하도에서 역 대합실에서 칠 바닥도 없이 하얗게 소금에 절이는 악몽을 꾸다 잠깬
  그의 작고 둥근 창문도 소금보다 눈부신 그 불빛 그리워할 것이다
  집에 도착하면 캄캄한 방문을 열고
  나보다 손에 들린 검은 비닐봉지부터 마중할 새끼들 같은, 새끼들 눈빛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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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자꽃 설화/박규리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 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문 하나만 열어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소리만 저 홀로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엷은 가랑비 엷게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 등도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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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탈(坐脫) / 김사인

때가 되자

그는 가만히 곡기를 끊었다.

물만 조금씩 마시며 속을 비웠다.

깊은 묵상에 들었다.

불필요한 살들이 내리자

눈빛과 피부가 투명해졌다.

하루 한번 인적 드문 시간을 골라

천천히 집 주변을 걸었다.

가끔 한 자리에 오래 서 있기도 했다.

먼 데를 보는 듯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간을 향해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저녁볕 기우는 초겨울 날을 골라

고요히 몸을 벗었다 신음 한번 없이

갔다.

벗어둔 몸이 이미 정갈했으므로

아무것도 더는 궁금하지 않았다.

개의 몸으로 그는 세상을 다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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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눈동자 / 곽재구

조선의 눈동자들은 황룡들에서 빛난다

그날 우리들은
짚신발과 죽창으로
오백년 왕조의 부패와 치욕
맞닥뜨려 싸웠다

청죽으로 엮은
장태를 굴리며 또 굴리며
허울뿐인 왕조의 야포와 기관총을
한판 신명나게 두들겨 부쉈다

우리들이 꿈꾸는 세상은 오직 하나

복사꽃처럼 호박꽃처럼
착하고 순결한 우리 조선 사람들의
사람다운 삶과 구들장 뜨거운 자유

아, 우리는
우리들의 살갖에 불어오는
한없이 달디단 조선의 바람과
순금빛으로 빛나는 가을의 들과
그 어떤 외세나 사갈의 이름으로도
더럽혀지지 않을
한없이 파란 조선의 하늘의
참주인이 되고자 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와 손주가
한상에서 김나는 흰쌀밥을 먹고
장관과 머슴과 작부가 한데 어울려 춤을 추고
민들레와 파랑세가 우리들의 황토언덕을
순결한 노래로 천년 만년 뒤덮는 꿈을 꾸었다

조선의 눈동자들은
황룡들에서 빛난다
그 모든 낡아빠지 것들과
그 모든 썩어빠진 것들과
그 모든 억압과 죽음의 이름들을 불태우며

조선의 눈동자들은 이 땅 이 산 언덕에서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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